타인의 일상에 귀 기울인다는 것의 무게
파견국에서 우리 가족을 지원해 주던 운전기사가 지병으로 사망했던 일이 있었다.
건강해 보이기만 하던 그가 갑작스레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 아내는 그날 자리에 앉아 한참을 이야기했다. 허망한 죽음을 향한 안타까운 마움,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우리 가족이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은 것일까 하는 고민, 우리 삶의 목적, 목표에 대한 고민들이 쉴세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손쉽게 궁극적인 결론을 내지 못했다. 대화의 주제가 결국 타인의 일상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을 그만두겠다며 그와 나눴던 대화과 내가 했던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 : "몸이 좋지 않아서 일을 그만두고 고향에 가서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아"
나 : "어디가 좋지 않은데?"
그 : "얼굴에 마비가 오고 두통이 너무 심하고 온몸이 부어."
나 : "병원에는 다녀왔어?"
그 : "병원에서 검사를 했는데 원인을 찾지 못했어. 고향에 가서 쉬며 전통의학으로 치료를 받아볼 생각이야."
나 : "어떤 검사를 했지? 그런 문제면 뇌나 심혈관 문제가 아닐까?"
그 : "피검사를 했고 X-ray 같은 걸 찍어본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의사가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하네"
나 : '(생각) CT나 MRI를 찍어봐야 할 텐데 비용 때문에 못했겠지... 내가 도울까? 내가 도와줘 검사를 해서 진단되면 내가 진료과정도 도와주길 기대할 텐데... 책임지지 못할 것 시작하지도 말자.(생각 끝)'
나 : "분명한 것은 전통의학으로는 절대 치료하지 못해. 뇌 쪽에 문제가 있는 것을 수도 있으니 꼭 병원에 가서 진단검사를 받아야 해.'
그 : '그런데 할 수 있는 게 없어. 일단 고향에 가서 좀 쉬면 나아질 것 같아.'
그 후 그로부터 몇 번 전화가 왔는다. 나는 전화를 받지 못했다. 아니 받지 않았다.
타인의 일상에, 건강과 같이 어려운 일에 개입되는 것이 큰 부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가 고향집에서 자는 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애써 무시했던 전화가 온 지 2주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그를 살릴 수 있었던 두 번의 기회(마지막 대화, 전화통화)를 내가 다 날려버린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책임지지 못할 것 시작하지도 말자.'라는 생각에 묶여 그의 삶에 단 한걸음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순진하기만 했던 대학생 시절 당당하게 외쳤던 삶의 모토가 생각났다. 'Live to share'
영향력의 확대를 추구했고 비교적 예산을 많이 집행하는 기관에 속한 사람이 되었고 또다시 더 큰 영향력을 고민하여 살고 있는데... 나는 실제로는 내 주변에 발생한 사례 하나에도 귀 기울이지 못하는 사람이 돼 있었다. 그렇다고 '건강보험사업'과 같은 것을 추진하여 그의 삶에 영향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돼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심플한 사실이지만, 나는 나 살기 바쁜 직장인이었다.
'부자가 되어서 이런 일이 생기면 마음 놓고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의료보험 제도가 제대로 안돼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의료보험에서 어떻게 일을 해볼 수 있을까?' 요 딴생각이 이어지는 그냥 평범한 직장인
그날 쉼 없이 이어진 아내와 대화 속에서 얻은 작은 결론은 '이런 일이 생기면... 도울 수 있는 만큼은 돕자.'였다.
구름 걷는 생각으로는 결코 어떤 것도 실현할 수 없으리. 단 하나라도 도울 수 있으면 그것이 우리 가족이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그의 유가족을 수소문해 적지 않은 조의금을 전달헀다.
그런데 속으로는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의금을 전달하면, 아이들과 미망인에게 잘 전돨이 될까?'
'여기 문화에서는 시댁 쪽에서 다 가져갈 수도 있다던데...'
아 어렵다. 타인의 일상에 귀를 기울이는 것. 나눔을 위해 산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