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모으기
운명의 상대와 만나 결혼했으면 좋겠지만 사십을 향해 달려가는 현재의 나는 그런 거 있어도 소용이 없더라고 생각하는 냉혈한이 되어 버렸다. 얼마나 그럴듯한가. 운명의 상대라니. 그런 말은 서로 콩깍지가 단단히 씌어있을, 한창일 때 만들어진 말일 거라고 생각한다. 진짜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대단한 운명의 상대라도 막상 식을 올리고 현실적인 몇 가지 일들과 부닥치고 나면 피폐해지는 건 매한가지일 것이다.
운명의 상대 대신 운명의 취미는 어떠한가? 당신들은 운명의 취미와 만난 적이 있는가? 나는 있었다. 착각이었지만. 취미가 뭐 별건가. 좋아하는 걸 시간과 돈을 투자해가며 즐기는 거다. 내 취미는 인형 모으기였다. 정정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형사기다. 마트에 파는 미미인형 그런 인형이었으면 참 좋았겠지만 외국에서 생산되는 그 인형을 위한 세계적인 페스티벌이 열릴 만큼 유명한 블라이스라는 인형을 모았다. 돈이 아주 많이 들어갔다. 새로 나온 인형 하나에 몇십만원이 그냥 깨졌으니까. 왜 하필 인형이야... 라고 후회한 적도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인형이 좋은걸.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인형만 실컷 사줬어도 이럴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한창 인형을 모을 땐 사진을 찍어 줄 목적으로 카메라도 사고 직접 인형 옷을 만들고 싶어서 재봉틀도 샀다. 당시에 엄마가 미쳤다고 했다. 내가 봐도 미친 것 같았다. SNS에 푹 빠져서 인형 사진만 보고 인형 사진만 업로드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재미가 없어졌다. 흥미가 떨어지고 만 거다.
이래서 뭐해? 남는게 뭐야? 내 돈 다 어디갔어? 적당히 즐겼어야 했는데 뭐에 꽂히면 끝장을 보려는 성정 때문에 결국 파국을 맞고 말았다. 인형 취미가 휩쓸고간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주제 넘는 소비로 몇 달 내내 거지처럼 살았다. SNS와 현실의 괴리를 피부로 제대로 느꼈다.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던 인형이 꼴도 보기 싫어졌다. 나는 인형을 모조리 안 보이는 곳에 쌓아두고 SNS도 비활성화 시켜버렸다. 지금에서 드는 생각인데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 2년 가까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는 자전거 타기가 내 취미다. 지인에게 추천 받아 자전거를 샀는데 그렇게 비싸지도 않고 그럭저럭 성능도 괜찮은 것 같다. 날 좋을 때 설렁설렁 끌고 나가면 딱 좋았다. 내게 딱 맞는 소비가 그 정도인 거다. 무언갈 살 때 일단 망설여지면 지르라는 게 내 신조였는데 그렇게 살면 망하기 딱 좋은 것 같다. 반대로 살아보자가 내 모토이다. 이번엔 지르지 않는다. 적당한 가격에 적당한 물건을 사서 적당히 취미활동을 하는 것이 현실적인 취미생활이라는 것을 이렇게 뒤늦게 깨닫는다.
나중엔 어떤 취미가 새롭게 생길지 모르겠다. 그때도 이렇게 건전한 소비를 하리라 마음먹는다. 소비의 끝은 뿌듯함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한바탕 잘 놀다 갑니다’라는 나이 지긋한 어른들의 덧글처럼 나도 한바탕 잘 놀 수 있도록 앞으로도 건전한 취미활동을 이어 갈 예정이다. 하지만 죽기 전에 다른 나라에서 열리는 블라이스콘엔 꼭 가보기로 마음 먹는다.(해외여행 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