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유권자들은 광복과 동시에 보통 선거를 했다. 어떠한 투쟁 없이 비밀이 보장되고 빈부와 남녀 차별 없는 가장 민주화된 선거를 실시한 것이다. 그만큼 투표권에 대한 자각도 늦은 편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투표 가능 연령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유일하게 만 18세에게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는 국가는 바로 한국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만 18세 투표권 문제가 정쟁의 수단으로만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하나의 정치 이슈로 만 18세 투표권이 등장하지만 선거 이후에는 제대로 된 논의도 없이 사라진다. 투표 연령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와 숙의 없이 정략적 도구로 선거 연령 하향이 진행된다면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클 수 있다.
충분한 논의 없이 급작스러운 투표연령 조정은 사회적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다. 우선 어느 연령까지 투표권을 낮춰야 하는지에 대한 입장 정리도 안됐다.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는 만 18세를 주장하지만 같은 당 대선후보인 이재명 성남시장은 만 17세까지 투표 연령을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과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은 교육감 선거를 만 16세까지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단순히 세계적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 외에 투표권이 왜 고등학교 재학생과 청소년에게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어 충분한 논의를 거쳐 결론을 도출하고 정해진 절차에 의해 투표권이 조정돼야 한다. 이런 과정 없이 전국 선거를 앞두고 개정 작업을 서두르면 첨예한 선거 쟁점과 더해져 사회적 오해와 충돌을 야기할 수 있다. 또한 선거연령 하향과 관련해 준비가 부족하면 사회적 혼란이 증폭될 수도 있다. 지난 2015년 만 20세에서 만 18세로 선거권을 낮춘 일본의 경우도 학교 당국이 학생지도의 어려움을 호소해 문부과학성이 추후에 가이드라인을 제작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현재 정치권 젊은 청소년 유권자들을 정치적 소수로서 권리 확대가 필요한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원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 젊은 유권층 지지가 높은 야당 대표들은 선거 직전에 와서야 관련 담론을 꺼낸다. 문재인 전 대표는 지난해 총선 직전에 만 18세 투표권 논의를 꺼냈다. 평소 의료영리화 위험이 있어 반대한 서비스기본발전법 통과까지 양보하겠다고 했다. 핵심 법안까지 포기하면서 도입을 추진했지만 선거를 통해 다수 의석을 확보한 이후에는 별다른 논의를 하지 않았다. 이후 대선이 본격화되자 다시 같은 논의를 꺼내놨다. 여권도 마찬가지다. 당장 다음 선거 유불리만 따져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논의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모양새다. 적통 보수를 자처하고 있는 바른정당도 하루 만에 만 18세 선거권에 대한 입장을 번복했다. 진지한 토론과 고민 없이 정치적 상황에 따라 입장이 오락가락하는 것이다. 여야 모두 당장 다음 선거에 적용되는 것을 가정해 정치적 이해득실만 계산하고 있는 모습이다. 선거연령을 만 17세로 조정하고 3년 후인 2019년부터 적용하기로 합의한 그리스 사례를 참고해 주권자로서 청소년들을 바라보고 좀 더 장기적인 관점의 논의가 필요하다.
사실 투표 가능 연령이 낮아진다고 어느 특정 정파에 유리한 것은 아니다. 평소 투표권 조정에 앞장섰던 진보·개혁 정당이 정작 투표권 연령이 만 20세에서 만 19세로 낮아진 2015년 이후 선거에서 패했다. 독일의 경우 2015년에 선거권 연령을 낮췄던 사민당이 직후 선거에서 가장 적은 득표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런 사실에서 시작해 청소년의 투표권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방향으로 선거권 연령을 정해야 한다. 대통령 선거 일정조차 확정되지 않은 지금의 상황에서 투표 연령에 대한 논의는 사회적 부작용만 양산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