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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anna Mar 24. 2021

마음의 면역

우울증 일기 14

'이 정도면 약을 꾸준히 드셨어요.'


의사가 지난 진료 차트를 넘겨가며 말을 하기 전까지 나는 육 개월이나 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주에 한번 병원에 찾아가는 일이 익숙해졌고, 약을 먹는 게 힘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덧 의사의 소견에 따를 만한 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지난해 시월부터 매일 밤 꾸준히 먹어온 약을 필요시에만 복용해 보기로 결정했다. 자신은 없지만 영원히 미뤄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약을 먹지 않은 최근 일주일을 나름 평온하게, 그리고 힘들이지 않고 보냈다. 여전히 배울 것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은 나날들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에게 깊이 몰두하는 시간이 적어진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나름 나의 병이 조금은 차도라는 게 있는 걸지도 몰랐다.

    작은 외삼촌으로부터 요즘 프로그램 개발자가 매우 귀하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얼마나 귀하면 신입사원에게 연봉을 육천만 원으로 제안한 회사도 있다고 했다. 나는 십 년 간 컴퓨터를 공부하고 삼 년 가까이 현업 개발자로 일을 했다. 주변에서는 항상 학위가, 경력이, 실력이 아깝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박사과정까지 마쳤다면 지금쯤 학교에서 직함 하나는 달았을 거라는 이야기부터, 그동안 쌓아온 실력이면 충분히 새로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도 듣는다. 사실 나는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일에 그 긴 시간을 쏟아부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고, 더 솔직히 말한다면 그쪽 분야에 그다지 미련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현실적인 문제를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불규칙한 수입에 카드 할부 값은 쌓여가고, 사업은 당장 몇 개월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다. 그래서 '그냥 한번 생각이라도 해 보는 건 어때?'라는 엄마의 말에 구직 사이트를 일 년여만에 들여다보았다. 약의 효과인 건지, 구직 사이트를 여러 차례 뒤져보는 데도 전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거나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이전에 작성해 놓은 이력서도 다시 한번 훑어보고, 제출할 만한 포트폴리오 파일이 남아있는지 확인했고, 성적 증명서와 경력증명서 파일들이 컴퓨터 폴더 속 어딘가에 잘 남아있는 것을 보고 다행이라 느꼈다. 

    전 회사와 분야가 비슷하고, 내 경력과 직무가 적잖이 맞아떨어지는 공고를 찾아냈다. 이력서를 제출한다면 그래도 면접은 봐볼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도 걸어보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해당 기업의 채용 사이트에 접속해, 이름과 나이를 입력하고 지원하고자 하는 분야를 선택했다. 익숙한 형태의 이력서 작성 화면 페이지가 나왔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부터 대학원 졸업까지 학교명과 재학 기간 등을 입력했다. 짧지만 경력 사항도 꼼꼼하게 작성했다. 국가 기술 자격증에 대한 취득 사실도 추가적으로 넣었다. 여기까진 그동안 내가 일궜다고 할 수 있는 결과물이니 순식간에 빈칸들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이십여 분 만에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다. 마지막 관문은 '자기소개서'였다. 빈 화면에 커서만 깜빡인 채 나는 한동안 한 글자도 입력하지 못했다. 나는 몇 년 전에 나처럼 또다시 거짓으로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아직 사회생활을 멋지게 해낼만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항우울제를 먹지 않은 게 겨우 일주일이고, 지금 하는 일에 더 미련이 남아 있다.  잠시나마 현실과 타협하는 일이 죽을 만큼 힘이 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음에도 '면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병은 한 번 앓고 나면 면역이 생겨 다시는 걸리지 않지만, 어떤 병은 예방접종을 해야 겨우 몸살감기로 지나간다. 어떤 병은 백신도 없고, 치료제도 없을 수도 있다. 환절기마다 찾아오는 감기도 있다. 마음에도 온갖 병들이 찾아올 수 있다. 단지 마음이 아프다는 건, 병이라는 사실을 환자 스스로 깨달아야 하고, 다 나았다는 사실도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나는 아직 온전히 마음의 면역이 생기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지만 잦은 병치레는 하지 않을 수 있고, 감기 정도는 약을 먹지 않고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를 더 이상 원망하고 싶지 않다. 진작에 아프다는 사실을 깨우치지 못한 나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시간들을 무사히 견뎌낸 나에게 위로를 해주고 싶다. 스스로에 대한 관대함과 위로만이 진정한 마음의 면역을 만들어주는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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