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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녕 쌩글삶글 Jan 15. 2020

똥개말랭이 너머 사람들

 [다같이돌자 동네한바퀴] 광석면 신당1리

부적에서 광석벌판을 가로질러 면사무소로 향한다. 광석중학교는 좌측으로 빠져야 한다. 오르막길이다. 가파른 이 길의 꼭대기를 똥개말랭이라고 부른다. 지금도 포장된 아스팔트 이길을 자전거 타고 오르려면 밑에서부터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페달을 굴려야 한다. 예전에는 비포장였으니 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더구나 지금은 산등성을 깎아내려서 그때보다 사람키 정도 낮아졌다고 한다. 거기에 빛돌공원이 있다. 그 사거리에 파출소가 있고 우측으로 빠지면 면사무소, 광석초등학교, 노성쪽이다. 


외지 사람들은 직진할 일이 별로 없다. 직진은 눈다리를 건너  부여로 가는 길이기도 한데, 부여 갈 사람은 좌회전 후 성동산업단지 큰 길을 만나 쭉 빠지면 되기 때문이다. 탄천IC로 갈 사람들은 면사무소쪽으로 갔다가 로타리에서 장마루길로 접어든다. 요약컨대, 직진은 이 동네사람들의 전용도로이다시피한 소로(小路)이다.  



세련된 카페가 반겨주는 신당리


똥개말랭이 넘어 직진하면 비교적 큰 동네가 한 가득 펼쳐진다. 예전에 당집, 신당이 있었다고 하여 신당리란다. 초입이 우체국이다. 그런데 그 옆에 우체국보다 더 모던한 건물이 하나 서 있다. ‘라온’이라는 간판의 세련된 카페. 시내에 비하여 손색이 하나도 없다. 어쩌다 찾는 손님이 계란동동 쌍화차 2잔 시켜놓는 시골다방은 간데 없고, 시골치고는 손님이 제법 이어지는 시골카페이다. 다방마님은 이 지역 유지이다. 쭉 내려가면 신당리 맨 끝에 있는 삼부자정미소 김권수 대표가 남편이다. ‘라온’은 순수 우리말로 ‘즐겁다’이다. 라온과 한 건물인 바로 옆 ‘소문난 농부’는 삼부자집 아들이 주인이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평화영농조합법인에서 쌀, 잡곡을 받아 인터넷 판매를 하고 있다. 


화려한 카페 바로 밑은 철공소다. 간판이 없다. 요즘은 손님이 적어져서 벌이가 시원찮다고 한다. 동네친구들이 오가다 들려서 조각나무 불을 쬐며 이야기도 하고 막걸리도 나누는 열린 사랑방이다.     


그 건너편이 노인회관이다. 정확히는 대한노인회 논산지회 광석분회이다. 8년의 임기를 채운 최광락 전임 분회장은 노인회관 한쪽을 작은도서관(작도)으로 떼어주는 데 선뜻 동의하였다. 그 결과 작도에서는 동네아이들이 찾아와 책도 읽지만 월요일에는 영화 한편씩 상영해주는 동네극장이다. 아이들이 찾아오는 또다른 이유는, 이곳이 와이파이가 터져서 휴대폰 게임을 실컷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영어강의도 했었고  [다같이놀자 동네한바퀴]도 한다. 광석면 자원봉사거점센터에서 초·중등생 15명과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홍성군 노인회장 이야기 


올 봄에 취임한 홍성군 분회장은 탁구 선수이다. 85세인데도 현역 탁구 선수이다. 실버탁구대회는 60~70대팀은 있는데 80대팀은 따로 없어서 70대들과 상대하다 보니 승률은 높지 않단다. 시합때 이름을 홍성군으로 달고 나가니, 입달린 사람마다 “서해안 홍성군에서 출전했느냐?”고 묻는단다. 


홍 회장은 2대 독자로서 유복하게 자랐다. 20대 결혼해서 술과 도박에 빠져 살다가 그 수렁을 벗어나기 위하여 시내로 나가서 운전을 배운다. 그리하여 30대때에는 택시도 몇 대 장만하면서 나중에는 덤프까지 운수업을 시작한다. 40대에 접어들어서는 부동산업도 겸하였다. 


노인회관 바로 뒤가 신흥떡방아간이다. 40대때 이 방앗간을 구입하여 내부 설비까지 마쳤다. 되팔기 위한 심산이었으나 작자가 나서지 않아 별수없이 직영을 해야 했다. 떡방아간 기계 돌리고 하는 일은, 나이가 한 살 차이고 9남매를 출산한 부인의 몫으로 돌아갔다. 전기 스위치 하나 못 올리던 부인은 밖으로만 겉도는 남편 대신 기술자가 되어 있었다. 어느덧. 세월은 40여년 흘러 이제는 아들(홍정흔)과 며느리와 함께 가족경영 체제이다. 최근 새로 단장한 떡방아간은 안으로 들어가 봐도 카페 분위기다.  방앗간 바로 옆의 콘테이너로 들어가니 홍회장 전용의 탁구장이다. 140만원을 들여서 장만했다는 탁구로봇이 쏘아올리는 탁구공, 공, 공.....  아침에 한 시간 정도 운동한 다음, 오후에는 논산 사회복지관 탁구장으로 나가서 즐기다 오는 일과이다. 


80여년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큰 고생 없이 살았기에, 집 식구 고생만 시켰기에 이제는 가족, 이웃과 나누면서 살아보려고 한다. 그래서 사비를 들여 노인회관에 각종 운동기구도 구입해놓기도 하고 고장 나면 직접 고치기도 하면서 사람들이 회관에 와서 재미있게 놀 수 있도록 노심초사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할머니들 발길은 이어지지 않아서 목하 고민중이란다. 사람 맘이라는 게, 탁구공처럼 주면 받고 하는 쌍방향만은 아닌 듯하다. 작은 도서관에도 공익요원이 한 명 근무했는데, 최근은 그나마 끊겨서 썰렁한 상황이다. 


참, 이 동네에는 경로당이 3개나 된다. 노인회관에서 조금 내려가면 농협과 의용소방대 건물이 나온다. 그 건너편은 주유소이다. 김구 주민자치위원장의 일터이다. 예전 아버지가 구멍가게 하면서 기름을 배달 판매했는데, 이제는 주유소로 우뚝 서 있는 변천이다. 


주유소에서 200미터쯤 내려가면 외따로 건물이 남자경로당이다. 그 건너편에는 토끼탕이라는 메뉴가 걸려 있는 신흥식당인데 문이 닫혀 있다. 여주인이 허리가 아파서 식당을 더 이상 못하고 누구 임자 나서면 세를 주려고 한다. 그 식당 뒤가 300평 정도의 연꽃 연못이다. 동네 청년회에서 조성해놓은 마을 공동 재산이란다. 그 연못을 끼고 좌로 진입하면 노인회관이 또 하나 나온다. 할머니경로당인데, 같은 건물에 간판이 두 개다. 하나는 당디경로당, 하나는 신당1리 마을회관. 



마을총회날 마을잔치~ 3부자정미소

 

1월 11일 토요일 아침, 마을총회가 열렸다. 100여호가 모여 사는 이 동네는 일 년에 세 번 모인다. 연초 총회, 어버이날 잔치, 8월 15일 두레날이다. 두레날은 풍물패와 함께 동네를 돌아야 하는데 최종수 이장을 포함하여서 3명밖에 성원이 안 되다 보니 두레풍악소리는 시원찮은 모양이다. 그래도 간만에 동네사람들 모여서 먹고 마시는 잔치만큼은 왁자지껄..... 60~70여 동네분들이  모인 총회날 마을운영비 결산을 마치고 나니 유별난 안건이 없었다. 작년에 이 동네 어린이집을 사갖고 이사와 요양원을 하는 이용순 늘사랑노인복지센터장의 인사도 있었다. 점심은 11시부터 시작되었다. 부녀회의 손길이 분주하게 돌아갔다. 방 세 칸에 긴 상들이 모두 다 펴졌다. 반찬으로 홍어무침도 깔리고 삼겹살도 굽고, 먹는 자리는 언제나 흥겹게 마련! 아침이 늦었던 기자는 밥 생각이 별로 없었으나 윤기가 짜르르한 쌀밥을 보니 군침이 솟았다. 한참 먹은 다음 자리를 일어나니, 면사무소 직원에 이어 농협조합장과 임원이 찾아왔다. 소문난 동네잔치이다. 


심상용 마을지도자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하였다. 식후 소화도 할 겸 걸어서 동네한바퀴. 그 중심은 마을회관과 연못이었다. 다시 연못쪽으로 가서 남자경로당을 거친 다음 삼부자방앗간을 들렀다. 인력이 가족경영으로 모자라 일하는 사람이 여럿인 이곳은 중소기업 수준이었다. 요즘은 인근에 정미소들이 대부분 없어져서, 일감이 꽤 많다고 한다. 인근 부여에서도 벼를 싣고 올 정도라고. 

정미소 건너편에 쌀 창고가 있고 카페 옆에도 판매장이 있다. 삼부자쌀, 삼광미가 경쟁력이 있고 매력적인 이유를 물었다. “삼부자 삼광쌀은 단일품종 도정 판매를 합니다. 주문시 바로바로 도정하니까 소비자가 좀더 신선한 쌀을 드실 수 있습니다. 삼광쌀은 충청남도 주력 품종이기도 합니다.” 노인회장이기도 한 김영관 회장은 “지금은 지게차가 엄청난 일을 하지만, 예전에 등짝에다 다 져날랐지.”하면서 회상에 젖는다. 


율리 집단이주민을 받아준 동네 신당리

 

정미소 안쪽길로 해서 동네를 다시 돌았다. 북쪽 날맹이에 이장집이 있었다. 이 동네 주산업은 벼농사이다. 마당에는 트랙터 등 벼농사에 필요한 장비차들이 우뚝 서 있다. 얼핏 한 집 같은데 마당을 사이에 두고 형제가 산다고 한다. 요즘 세상에 형제가 바로 옆집에서 평생 산다는 것이 외려 이상스레 느껴진다. 형제간 우애가 여간 좋지 않아서는 안 될 거라는 지레짐작 때문에. 언덕을 오르니 한상빈 씨 사과농장이다. 길 건너편은 배농장이고 거기에는 심 씨의 동물농장도 있다고 일러준다. 날맹이에 우뚝 솟은 송신탑 부근에서 북쪽으로 쳐다볼 때 큰 길 건너까지도 신당리라고 한다. 거기가 요즘 핫한 동네이다. 항공장으로 동네를 통째로 비어준 율리 사람들이 집단 이주해온 곳이기 때문이다. 


광석면사무소는 3개리의 꼭지점이기도 하다. 빛돌공원 사거리를 기준으로 해서 경찰서쪽은 이사리, 광석중학교쪽은 천동리, 면사무소와 광석초등학교 아래쪽은 신당리이다. 지금 새마을지도자가 지목하는 곳은 면사무소에서 노성쪽 방향으로 300미터쯤 더 가서이다. 그 길 왼쪽에 전원주택 10여 채 신축되어 있는데, 그게 바로 이주민들의 새 안식처이다. 그 주택 건너편에 ‘고깃간’이라는 대형 식당이 있다. 입구에서 한우를 사서 들고 가는 정육 식당인데, 그 큰 식당이 그득 찬다. 개업한 지 오래된 곳도 아닌데, 부여에서 찾아올 정도로 핫한 맛집으로 소문이 난 모양이다. 


저 멀리에서 눈길 거두고 다시 가던 길 갔다. 예전에 동네쉼터였다는 기지국 부근을 지나니 심상용 씨의 농장이다. 한시까지 의용소방대 회의가 있다 했지만, 차 한 잔 마실 겸 와송 농장을 들렀다. 명함을 보니 ‘논산자연와송’ 자연이라... 노지재배, 자연재배를 고집해 왔다고 한다. 와송을 접한 것은 7년전 잠시 쉴 겸 집에 내려왔고, 그때 1년 3개월 정도 방앗간에서 일을 한 데서 시작된다. 그때 정미소 공장장이 말하기를, “내가 방광암인데, 와송을 먹으면 확실히 효험이 있다”면서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더란다. “그럼 우리 밭 빌려줄테니 거기에다 심고 함께 가꾸자” 제의했지만다. 그 공장장은 초기 투자비용이 없어서인지 응하지 않았지만, 심상용 씨는 그 말을 듣고 와송을 심었다. 


그 후 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고 6개월밖에 못 산다는 판정을 받았다. 달리 방법도 없고 하여 와송을 약으로 드시게 하였더니 신기하게도 5년 정도를 더 사셨다고 한다. “아버지 돌아가시면 다시 서울로 가려했지만 아버지께서 밭을 물려주셨으니 지키며 고향지키미로서 부모님 욕되게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지역 봉사와 더불어 어려서부터 광석중앙교회에서 믿음을 이어갑니다.”


만석군이 살던 대저택의 지붕


남로당 만석군이 살던 동네 


차를 마신 다음 다시 마을 회관으로 향하는데 도중에 공장 하나가 보인다. 현재는 워셔액 제조공장인데 예전에는 양조장을 하다가 또 바뀌고, 한때는 면사무소도 있었는데, 면사무소도 똥개말랭이로 이전을 했고, 현재는 이 공장이 들어섰다는 설명이다. 그 부근의 요양원도 주인이 바뀌었다. 어린이집은 똥개말랭이에도 있었는데, 그것 말고 마을 안쪽에도 2층 건물로 하나 있었다. 요즘 마을에 아이가 없다 보니 그 어린이집은 작년에 매각되고 요양원으로 변한 것이다. 


그 정도 변하는 것은 약과인 거 같다. 마을회관으로 돌아오니 반겨주는 분이 하나 있다. 나이 지긋한 분이 동네 옛날 이야기 들려준다면서 회관 옆 고택으로 이끈다. 계룡시에서 살다가 광석으로 이사온 한상빈 씨 집이다. 독립운동가 한훈 선생의 손자인 한상빈 씨가 현재 살고 있는 주택 바로 옆에 있는 고택은 천석지기가 아니라 만석지기의 저택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폐가 수준에 가깝지만 예전의 영화와 위용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증언한다. 현재 그 고택을 중심으로 하여서 날맹이 위쪽은 모두다 그 집의 행랑채였다고 한다. 고택 옆으로가 ‘마름’이 살던 집이고, 좀더 내려와서는 창고지기가 살던 집이었다며 세세히 일러준다. 만석지기 아들이면 부러울 게 없는데, 그집 아들(윤석주)이 남로당을 했다고 한다. 이승만의 토지개혁와 6·25를 거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는데, 이런 대토호가 좌익을 했다는 게 실감나지 들리지 않았다. 마치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실제 무대가 여기가 아닌가 싶어졌다. 지금은 자꾸 허물어져서 폐가처럼 보이기에 “문화재로 지정을 받아서 보전과 역사캐기를 해놓으면 좋겠는데, 정작 나서는 사람이 없다”고 한숨이다. 


역사는 그렇게 묻혀가는데, 그 집의 새 주인인 한상빈 씨 내외는 또다른 역사를 써내려왔다고 들려준다. 부인(남은신)은  하루 두 시간씩만 자면서 일하는 남편을 따라 낮에는 논밭일 종일 하고도 밤에는 콩 타작한 날 같으면 한밤중에 콩을 깨끗게 선별하여 1kg들이 봉투에 넣는단다. 시장에 내다 팔려고 그리 정성을 들이는 게 아니라 20kg 쌀 한포와 콩을 한 세트로 하여서 동네는 물론 예전에 살던 동네 사람들 중 어려운 이웃 있으면 챙겨주기 위해서 그 고생 정성이란다. 


한훈 선생 후손인 한상빈 씨 집(빨간지붕). 항공사진 찍으려 올라간 마을회관 3층. 사다리가 넘 짧아서 내려올 때 후덜덜ㅠ


새벽에 깻잎따는 사람들 


이런 수고는 한상빈 씨 부부만 그러는 게 아니다. 동네 사람들 일하는 거 보면 대동소이해 보인다. 이 동네의 수입원은 쌀 외에도 깻잎이다. 비닐하우스 재배를 하는 사람들은 밤새 전등을 켜놓는다. 그래야 꽃대가 올라오지 않아서 깻잎을 계속 따낼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노지 재배는 다르다. 이 동네 깻잎농사는 전부다 노지재배인데, 깻잎은 이슬 젖어 있을 때만 딸 수 있기에 오밤중에 일어나 깨밭으로 향한다고 한다. 두 내외가 하는 깨농사 1년 매출액을 물어보니 1천만원대! 고수익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새벽 노동의 댓가가 큰 거 같다. 


노동 중에는 동네일 봉사도 포함된다. 마을 일은 돈이 나오기는커녕 어떤 때는 내 돈 들어가면서니까 임원직은 기피 감투이다. 동네한바퀴 도는데 난데없이 스피커 소리가 울려퍼졌다. “마을회관으로 다시 모여달라”는 것이다. 아니, 점심 먹고 들어간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다시 모이라니... 회의가 다시 열리고 뚜껑을 열어보니,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이장직을 더 이상 수행해갈 수가 없다”는 게 총회 재소집의 요지였다. 


그 동안 이장 부인이 부녀회장을 함께 맡아서 동네일을 해왔는데, 동네 일이라는 게 밑도 끝도 없다 보니 이장인 남편에게 “그만 두라”고 주문을 했던 모양이다. 부녀회장도 내놨지만 새로 맡겠다는 사람이 안 나섰다. 남편도 여전히 이장직을 수행하겠다고 하니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판단이 들면서 귀가하자마자 남편에게 대판 따진 모양이다. 총회 전후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분이 있어서 기자가 옆 사람에게 “저분 누구세요?”라고 물었더니 부녀회장이라고 했다. “어제부터 장 봐가지고 와서 고생 혼자 다 하지.” 이런 동네 노인들의 칭찬이나 인정도 이제는 임계점에 달했나 보다. 


이장은 집안 사정을 다 털어놓더니 한 마디 한다. “내가 이장 말고도 30여 년을 의용소방대다 뭐다 하면서 동네일 해왔는데, 그게 좀 그래요. 어쨌거나 집안이 편해야 하니까 이해들 해 주세요. 그리고 우리는 나이가 너무 들어서 면사무소에 가도 아들같은 직원들과 얘기하는 게 편하지 않을 때도 있어요. 다른 동네도 보면, 이장들이 젊어요.”


신당1리도 마을자치회가 구성되어 있다. 마을직제와 동일하고 위원은 20명이다. 작년도 받은 300만원으로는 마을대청소를 하였다. 신당1리 주민 40여명이 마을 내 장기방치된 불법쓰레기를 처리하고 회관 주변 등 통행이 많은 마을 내 구역을 집중 청소하였다. 이러 저런 일이 이장 가족에게 부담이 되었던 모양이다. 


새마을지도자 하다가 이장으로 선출된 심상용 씨. 노지재배하는 #논산자연와송 주인


동네한바퀴 사람 여행 


긴급 회의에 참석하여서 이장을 맡게 된 심상용 씨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다음, 그의 본업과 그 외에 어떤 일들을 하는지 물어보았다. 


“제가 하는 것은, 와송농사가 주가 되겠고요 농작물마다 그대로의 기능을 살려 지속 가능한 작물 및 축산으로 키우는 일입니다. 건강 지키미로서 명품화 농산물을 지향하고, 장기적 특산 품질에 주력합니다. 동네일은 좀 많아요. 새마을지도자 총무, 의용소방대 서무반장과 재무, 노인회총무까지요. 농업기술센터에서 귀농교육과 건양대평생교육과정에서 4년 정도 교육농장과정 및 축제관련지도자과정을 이수했어요. 충청남도교육청 소속 농어민명예교사로 체험교육농장을 겸하고 있어요. 지금 나가는 학교는 노성중, 채운초, 성동초, 부창초, 강경황산초고요, 광석초 학교지키미 활동도 해요. 배드민턴클럽에도 나가구요. 예전 직업과 연계해서 요양보호사로도 간혹 활동하고요. 축제도 공부했기에 그린투어 과정을 하고 강경젓갈축제 황포돛배해설사로 활동했습니다.” 


대충 들어보아도 현기증이 난다. 동네한바퀴 도는 데 하루가 모자랐다. 지역여행이라기보다 사람여행이 되어서다. 총회가 열린 날 젊은 아낙 하나가 참석하였다. 동네 사람이 아닌 듯하여 물어보았다. “여기가 친정예요. 회관에는 제가 간다했어요. 어릴 적 오전 새마을 운동했던 장소이기도 하고, 어르신 독거노인 쟁반봉사는 내가 사는 대전에서도 가끔 해요. 앞으로는 시간이 되는 한 마을잔치에 나와 주방일이라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2월 17일은 우리 조상님 합동제사로 큰집에서 지내고는 있지만 조상에 대한 마음을 중시하지 않는 듯해서요.... 조상님을 제대로 모셔야 한다는 저와 부모님, 고모의 뜻과 생각이 일치하여 큰집과는 무관하게 저희집에서 모시기로 한 너무도 중요한 제삿날입니다.” 현재 프로 무용수로 전국적으로 활동중인 신당리 출신 홍명원 씨의 대답이다. 


[글·사진] 이지녕

위 글은  『놀뫼신문』  2020-01-15일자 2면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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