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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녕 쌩글삶글 Mar 29. 2020

관동2리쪽 '황산성' 둘레길과 동학군전투지

- 논산의 비경 ‘황산성’ 가는 길

백제 수도인 부여의 최후 보루성이 논산에 둘 있다. 하나는 노성산성이요, 하나는 연산의 황산성이다. 계백장군이 5천 결사대를 이끌고 신라 5만대군과 맞서다 장렬히 산화한 곳, 황산벌이다. 사람들이 황산벌은 익숙해도, 그 전투의 사령탑인 황산성의 존재를 잘 몰랐다.


연산 사람인데도 모르는 이가 있었다. 황산성은 연산천 건너편 계룡산 끝자락에 숨어 있어서다. 연산시장에서 연산순대집을 끼고 철도 건널목 지나 관동교 건너면 흰돌로 된 관동리 이정표가 반겨준다. 관동리! 예전 화랑 관창이 애석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관창골’이라고도 불렸다. 관동2리에는 가장골이 있다. 황산벌 전투에서 죽어나간 무수한 시체들을 가매장한 곳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게 아닌가 추정한다.


황산성은 계룡산 거의 끝자락인데, 산을 거슬러 올라가면 송정리, 화악리, 도곡리이다. 송정리에도 무수한 시체가 쌓여서 그런 이름이 붙은 건 아닐까? 이러저런 추정이 설득력 가질 만큼 처절했던 전투가 황산벌전투이다.


황산성 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대개는 직진, 관동1리 동네를 관통하여서 산길을 오른다. 황산성 바로 밑의 주차장까지 차로 가면 10~15분 걸린다. 속도를 낼 수 없는 임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르는 길이 또 하나 있다. 좌회전, 관동2리길로 접어들면 나온다.




향교가는 길 관동2리 한복판


관동2리는 향교 가는 길이다. 요즘은 “정원일기”라는 전원카페가 생겨서 그 팻말을 따라가면 더 쉽다. 시골카페 이웃집이 관동2리 마을회관이다. 그리로 해서 50여호 옹기종기 사는 동네 한복판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막바지에 향교가 나온다. 향교 가려는 차는 향교 홍살문 아래 주차장에서 내려야 한다.


연산향교

주차장은 한국신약 연수원 바로 앞이다. 그 일대 산은 한국신약 한만우 회장의 선산이기도 하다. 매번 황산성 등반객을 동반해주는 관동2리 김태원 이장의 설명에 의하면, 한 회장은 마을회관 지을 때 5천만원 시사할 정도로 동네일에 협조적이라고 한다. 그 앞마당처럼 보이는 곳으로 진입하면 막힌 듯 보이는 곳에 샛길이 숨어 있다. 골짜기 건너 좌측에는 한회장 선산과 큼지막한 묘비가 보인다. 좀더 올라가면 아담한 집이 하나 나온다. 동화 속 빵으로 된 집처럼, 온통 나무와 서각으로 장식된 집이다. 연산리에는 서각수강생 모집 현수막이 나부끼는데, 서각을 하는 한존정 서예회장 집이란다.


차로 조금더 밀고 올라가면 대연암이라는 암자다. 여기부터는 앞마당에 주차하고서 걸어가야 한다. 좁은 산길은 아니다. 길 따라 300미터쯤 올라가니 드디어 주차장이다. 오르는 길 좌측은 논이었다고 한다. 이 고지대에 벼를 심었다는 것은 하늘물도 내렸겠만, 일대가 습지대이어서란다. 동행하는 김 이장은 멧돼지가 목욕하다 간 자욱들을 손으로 가리킨다. 10여분 오르니 드디어 주차장이다. 관동1리 굽이쳐오는 임도로 해서 차 끌고 오는 시간이나 비까비까인 첩경(捷徑)이다. 예전 황산벌 전투를 지휘했던 황산성주는 이 길로 직행해서 오르내렸을 것이다.


주차장 입구에는 수도 시설이 돼 있다. 음료적합 판정이 붙어 있다. 지하수 모터를 작동시키는 걸 보니 전봇대가 이 고지에도 심겨져 있는 것이다. 백제시대 때도 그랬던 거 같다. 100여m에 달하는 황산성 진입로에서 올려다보니 허물어진 성벽이 눈에 들어온다. 황산성 한복판은 큰 우물이다. 사람이 거주하는 데 물이 필수인데, 황산성채에는 정주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 같다.

자연생태학습지로서도 보고인 황산성 일대



황산성복원회와 둘레길, 자연학습장


황산성복원회가 결성된 때가 2년쯤 되었다. 연산면민들 스스로 일어난 민 주도의 모임이었다. 현재는 도기정 위원장과 23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그 동안 자비와 주민자치회비 3천만원을 들여서 황산성 둘레길을 조성하였다. 전체 800미터 중 2/3 정도를 야자매트로 깔았고 정자 하나도 지었다. 기존에 지어졌던 정자는 깃대봉쪽에 있었는데, 이로써 정자는 두 개가 되었다. 문은 서문과 동문 두 개만 발견되었는데, 문을 비롯한 성곽의 복원과 발굴 등에는 거액이 들어간다. 2년 전 대추축제에서 황산성복원회가 자체로 마련한 기금 1천만원을 시에 기탁하자, 의회에서는 김만중 시의원이, 시에서는 황명선 시장이 화답하였다. 충남도에서도 김형도 도의원이 애정을 기울여서, 총 2억의 예산이 배정되었다. 올해는 이밖에도 주민자치사업비 2~3천의 예산이 집행을 기다리고 있다. 황산성둘레길 나머지 300m를 정비하여 학생들도 큰 어려움없이 돌아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이다. 현재 황산성 관리와 둘레길 사업은 보존회에서도 주관하지만 주민자치회에서와 연대 진행중이다.

성안의 우물과 군청지의 연화문와당

백제시대, 금산의 탄현성이 무너지자 황산성은 백제결사군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황산성 안에는 깃대봉 주변은 물론 도처에 기와조각이 널려 있다. 연화문와당인데, 이로 미루어보건대 황산성주는 고관대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까지 황산성은 서울에 거주하면서 이곳에 자주 내려오는 이재준 역사연구가가 애정을 기울여왔고, 이러저런 추정도 현재로서는 그의 사견이다. 지난 대추축제때 이재준 작사 김가연 노래로 “아 황산벌”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황산성복원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이제 황산성은 다방면에서 본격적인 연구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역사연구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현재 황산성 우물가에는 도롱뇽알 투성이다. 이 동네에서 태어나 환갑을 맞은 김태원 이장은 방문객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참 많다. 학생들이 올라오는 날이면 장화를 신고 들어가서 우물가를 정비한다. 뱀 같은 위험 동물도 살펴본다. 산토끼는 요즘은 전멸 상태다. 들고양이 개체수가 늘어나다보니 토끼 새끼들이 견뎌내지 못해서란다. 황산성에서 표정리와 어은리, 금강대 인근까지 이어지는 임도(林道)에 꺼병이(꿩새끼)도 간혹 포착된다. 이러저런 생태계의 보고 한복판이 황산성이다. 종합교육장이 되는 것이다. 주변의 연산홍 군락과 되짚어내려가는 임도도 식물학습장이 되지만, 동시에 이 지역 주민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서 관리해 주어야 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2018 대추축제때 황산성복원 의지 선포

 

계룡산 끝자락 황산성과 연산천


다시 동네로 내려오면 좌측으로 연산 향교가 눈길을 끈다. 춘계 추계 석전 대제때 아니면 방문객이 별로 없는 곳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관리동에 사람이 거주했다고 한다. 관리인이 거주하는 관동1리 성주도씨 종중 고택과 대비가 된 상황이다. 향교 뒤편으로 해서 황산성 진입도 가능하기는 한데, 사람 손길이 한참 가야 하는 미답지 상태이다.


산 아래 관동리 마을사람들은 연산천을 내다보며 생활한다. 벌판에는 형체가 특이한 괴목이 있고, 동네 초입에 또 하나 미목이 있다. 쌀, 딸기가 주작물인 전형적인 논산, 농촌마을이다. 연산천 뚝방길 따라서 북으로는 작년에 처음으로 무궁화마을축제를 연 송정리다. 범골 끝자락에는 양지서당이 있고 아이들은 검도 수련중이다. 천연기념물 화악리 오계는 좀더 북쪽이다. 뚝방길 따라 남쪽으로는 고양리인데, 계룡산의 끄트머리이다. 그 연산천 건너편은 대추축제가 열리던 고수부지이고 농협공판장과 연산역이다.


이렇게 행정구역은 갈리지만 이 모든 동네를 품어주는 엄마품은 황산성과 연산천이다. 예전에 이 연산천을 따라 배도 들어왔다고 하는데, 지금은 수량이 적어서인지 실감이 잘 안 난다. 황산성과 연산천, 그리고 황산벌 이야기, 그 속편이 기다려진다.


[글·사진] 이지녕

위 글은  『놀뫼신문』  2020-02-20일자에 실렸습니다.

[논산의 비경 ‘황산성’ 가는 길]

https://nmn.ff.or.kr/17/?idx=3129176&bmode=view



동학유적답사, 연산현감 아들이 동학도였다고 전해지는 관아터에서 출발


[논산정신과 논산동학]


온나라 농민군 품어주고 결집시킨 논산동학


논산동학농민혁명 계승사업회가 그 동안 묻혀져 있던 ‘논산동학’의 정신을 찾아나섰다. 동학유적 첫 번째 답사지로 택한 곳이 연산의 관아터와 황산성였다. 논산동학답사팀은 2월 9일 오후 3시에 연산관아터에서 만났다. 아들이 동학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붙들려 고초를 겪은 연산현감 이야기가 동학소설 ‘은월이’에 나온다. 연산전투 장면에 이르기까지 각자 알고 있는 당시 얘기를 주고받으며 황산성으로 향했다.


13일에는 논산시농민회에서 동학연구가인 ‘은월이’ 작가 한준혜&정선원 부부 초청특강을 가졌다. 논산의 정신 일단을 동학에서 찾기 위한 노력들이 줄을 이어가고 있다. 126년의 세월이 흐른 1894년, 논산에서는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천도교의 모체인 동학은 서학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비친다. 기독교 같은 서학을 배척하는 종교적인 선입관도 드리워져 있다. 그런데 과연 동학을 종교로 볼 것인가? 평등사상을 제창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동학은 서양의 민주주의와도 닮았다. 엄밀히 보면 서로 등질 사이도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동학이 논산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동학에서 논산정신과 농민정신의 원동력을 찾으려는 노력은 2018년 7월 12일 논산농민회의 농민역사학교에서였다. “동학농민혁명과 논산”을 주제로 특강이 이어졌는데, 이때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논의되었다. 전주화약일과 논산결집일 두 가지를 놓고 논의 진행중이며, 전주화약일로 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라는 상황이 보고되었다. 논산 지역은 2차로 봉기한 남접, 북접의 동학농민군이 총 결집하였던 곳이다. 4천명에서 출발한 전봉준의 군대가 논산에서는 5만대군으로 불어났다. 이 기적 같은 일이 논산에서 가능했던 것은, 논산이 그만큼 동학에 대하여 우호적이었고, 동학 천지였음을 방증한다. 그럼에도 ‘동학’ 하면 전라도쪽으로만 편중된 게 오늘의 현실이다.


800미터 길이의 무너진 황산성터(말과 사람 드나들던 서문터 흔적)


관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논산시는 작년도 8월 29일 논산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에서 ‘논산 동학농민혁명의 계승과 활용방안’을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논산시가 주최하고,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이 주관한 세미나는 논산 지역의 동학 농민혁명 집결지 및 전적지에 대한 위치와 당시 활동상황을 고증하고, 동학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람중심 정신을 되새겨 역사적 사건과 유·무형 유산의 활용방안을 모색하였다.


그 바통은 이어지면서 작년도 연말 12월 18일, 논산시 농민회에 민예총 논산지부, 전농 논산시농민회 등 8단체가 모였다. “논산 근현대사로 ‘새세상’을 밝히다”는 기치 아래 <논산 동학농민혁명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강사로 나선 민중사 연구자 박성묵 소장은 논산동학에 세계사적 의미를 던져주었다. 논산동학이, 국내 국지전의 선봉장였던 전봉준에게 매몰되어 있다는 점을 꼬집고나왔다. 역사적 사실로 보더라도 논산동학과 노성민란은 전봉준 봉기보다 1년 앞서서 일어났다. 동학군의 상대는 동족인 조선인이 아니라 외세인 일본제국주의였다. 논산에 모인 동학군들은 관군이 아니라 일본군대와 싸우기 위하여 모여든 창의군이었다. 처음에 동학을 탄압하던 조정에서도 이제는 외세 몰아내줄 세력으로 논산동학을 기대하고 밀지까지 내려보내던 상황이었다.


황산성에서 황산벌을 내려다 보며


논산동학, 전봉준에 밀려버렸지만


당시 동학의 중추지는 논산이었다. 전국에서 집결지로 논산을 지목했던 이유는 논산 지역의 후한 인심이요 분위기였다. 동학은 사농공상을 부정하며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의 기치를 들고 나왔다. 당시 기득권층였던 유학자, 양반들에게 정면 도전하는 이 사상을 양반들이 반겼을 리 만무하다. 동학을 궤멸시키다시피한 세력은 외부 세력, 외세 일본군였지만, 그 전에 동학의 가장 큰 적은 유학자 집단 사림(士林)이었다. 그런데 논산 노성 유림들은 동학을 그렇게 핍박하지 않았다. 동학을 환영하지도 않았지만 탐관오리들 작태가 심하니 그러한 세력에 저항하는 동학의 움직임을 못본 체하거나 짐짓 동조하였던 분위기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원년이다. 아니 그렇게 못 박아놨다. 그러나 그것은 박정희 정권이 전라도 사람들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용인한 것이지, 사실은 논산이 한 해 앞선 1983년 봉기했다. 이 사실을 명쾌하게 정립해 놓은 논산인이 있다. 논산향토문화연구회 윤흥식 총무이다. 그는 “파평윤씨 노성종중의 독립운동”이라는 연구논문 3장 ‘노성종중의 절의節義 정신’을 다루면서 ‘1893년 동학의 노성민란(魯城民亂)과 노성종중’을 상세하게 적시해 놓았다.


이러한 노력들이 하나씩 결실을 맺으면서 지난 1월 7일 ‘논산동학농민혁명 계승사업 준비위원회’가 논산농민회에서 열렸다. 조직구성으로는 준비위원회 산하에 3개의 분과를 두기로 하였다. 연구조사, 현장답사, 기념사업 분과이다. 준비위원장에는 김선덕 전 농민회정책실장이 맡았다. 산하 분과위원장으로 연구조사위원장는 윤여진, 현장답사위원장에 변해숙, 기념사업분과위원장에 배형택 농민회정책실장이 맡기로 하였다.


이날 결정된 현장답사 일정에 따라 2월 9일 연산관아와 황산성을 오른 것이다. 이날 답사 후 다음 답사지로는, 그간 인구와 문헌에 회자되는 소토산으로 정했다. 소토산(小土山)이 과연 어디인지? 여러 의견이 제시되면서, 논산동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의 필요성이 더 제기되었다. 다행히 최근 논산 동학교도들의 교적부가 발견되고 논산 배경의 동학소설도 발간되었다. 그 동안 동학연구불모지에서 논산동학의 기초를 닦아온 연구자들이, 논산에서도 동학 연구를 시작했다는 소식에 협조를 해주고 있다. 가도가도 황톳길이 아니라, 뜻이 있어서 열리는 길이다. ‘동학진군로’,  ‘논산동학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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