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노포] 이대우 삼천리자전거 논산대리점 대표 이야기
아래 기사는 2021-09-08 놀뫼신문에 실린 기삽니다. 이 내용을 취재하는 데 걸림돌이 두어 개 있었습니다. 일단 주인이 “그런 걸 뭣하러 햐?” 하면서 손사래를 치더군요. 와중에 파토까지는 나지 않게 도운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아우 이정용(대교3통장) 덕분이었달까요, 형은 약간 불퉁한 데 비하여서 아우는 사근한 것도 조화라면 조화였을 겁니다.
또하나의 걸림돌은 인척관계였다는 점입니다. 취재하면서 세운 원칙은 <혈연, 학연, 지연을 최대한 배격하자>입니다. 혈연 조항이 잠시 걸렸지만, 거기에 전혀 가책이 없었습니다. 70여 년의 노포 취재에 무슨 명분이 더 필요하랴 싶어서였달까요? 내용을 뻥튀기할 필요성도 거의 느끼지 않았으니까요....
오늘, 1년 여 만에 찾아갔죠, 자전거 앞바퀴가 펑크 난 거 같아서..... “#무시 가 불량한 거 같다”며 그걸 갈아끼우고 뒤바퀴까지 바람 빵빵 넣고 녹슨 체인에 기름 치고... 소위 “닦고 조이고 기름치고” 완결판 후 나오려는데, 과묵모드인 주인도 드뎌 방언이 터지더군요. “아, 이 밑에서 안경점하던 *** 씨가 전화가 왔어.”부터 시작하여 몇몇 사람이 신문 보고 찾아온 적도 있다며, 입이 귀에 걸린 수다였습니다. 기사는 액자 맞추어서 모셔놓고.... 자전거 수리비용 안 받는다길래, 나는 “신문기사 코팅해 갖고 오겠다” 답했습니다.
“줄기차게 써본들 그게 무슨 의미고, 대체 무슨 소용 있으랴?” 허탈감과 회의감이 몰려드는 요즘, 어느 스님은 내 글쓰기에 대하여 “그 사람의 부활(復活)”이라 표현해 주더군요. 정녕 그런 건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취재전 손사래 vs. 취재후 반색> 대비표를 받아본 오늘, 그래도 내가 해온 다큐 기록들이 나름 유의(有意)하다는 자위를 해보았습니다. 서론이 길었고요....(본론도 용두용밉니다요~~~~~^)
부여쪽에서 새 다리(논산대교) 건너자마자 시내 초입인 대교동 일대는 특화거리다. 좌측으로는 오토바이 가게가 두엇 있으며, 우측으로는 농기계 업체와 철물점이 즐비하다. 여기 시계는 일찍 일어나는 외곽의 농촌 시계에 맞추어져 있다. 한때 유명했던 싸전거리에서 이제 농기계거리로 상전벽해한 이곳에, 유독 나 홀로 자리를 지키는 점포가 하나 있다. “삼천리자전거 대리점”이다. 70여 년 전 ‘태창윤업사’로 걸었던 간판을 2대째인 이대우 사장이 갈아달기는 했지만.....
오래된 점포 노포(老鋪)의 기준은 대략 50년 안팎으로 잡는 분위기다. 70년이라 하면 6·25때쯤이다. 자전거포 창업주 이종옥 씨는 기미년 1919년생이다. 기미년 3·1운동은 기민중학교와 관계가 깊다. (본지 2019-02-20 강경3차시위와 심암리 이근석 선생; 논산시민이 세운 기민중학교와 심암리 nmn.ff.or.kr/17/?idx=1617505&bmode=view 참조).
기민중학교를 설립하신 이근석 선생은 학교 주변의 기미년생들을 한데 모았다. 태성운수 김준태, 접골원의 김남균, 자전거포 이종옥... 이렇게 10여명을 모아 ‘3·1계’를 조직하였다. 사적인 계모임이었지만 공적 의미를 부여받은 이 모임은 꽤나 오래 지속되었다. 멤버 중 하나인 이종옥 씨는 전쟁이 끝나고 삼십대에 ‘태창윤업사’ 간판을 걸고 개업하였다. 그 후 30여 년 운영했는데, 말년에 큰 아들 이대우 씨가 거들면서 자연스레 대물림했고.... 그로부터 흐른 세월이 40여년 성상이다.
“아버지도 징용에 끌려갔는데 탄광쪽이 아니라 비행기부대였다나 봐요.” 둘째 아들 이정용(대교3통장)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흑역사다. 그래도 그때 묻혔던 기름이, 기계에 대한 눈썰미가 해방과 전쟁 거치면서 자전거로 꽂히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당시 자전거포는 성업(盛業)중이었다. 최신식 교통수단이던 자전거는 일대에 조화양조장 등 굵직한 업체도 많아서 손님도 많았다. 자전거 하면 삼천리표가 인기 절정이었고, 그 상표로 돈을 많이 벌었다. 하지만 ‘삼천리표자전거’ 간판은 걸지 못했다. 공식대리점을 한 군에 하나씩만 내주어서였는데, 논산대리점은 시내쪽 경원다방 자리에 있었다. 한때 성하던 그곳도 주인 사후 부인이 이어받아 운영했으나 현재는 문을 닫은 상태이다.
자전거포가 성업일 때 논산읍내에는 20여 개의 점포가 있었다는데 현재는 7개소 정도다(타 읍면동은 별도). 홈플러스 같이 판매만 하는 곳도 있지만, 대개는 조립, 수리, 펑크 등을 병행한다. 펑크 때우는 데는 5천원, 주부째로 가는 경우 1.5만원이 시세다.
세월이 많이 변했다. 삼천리표 자전거라면 이름, 이미지부터 국산을 연상하지만 중국공장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자전거포에서는 박스채로 받아서 중심 잡는 일부터 기아 조정 등 조립해 주는 일을 한다. 요즘 자전거 한 대 가격을 물어보니 기아에 따라서 다른데 21단짜리는 20만원, 30단 이상은 40~50만원 선이라고 한다.
“초장기에는 자전거 바퀴살 하나하나 구멍 맞추어 끼워야 해서 하루에 완성하는 자전거 대수가 많지 않았어요. 지금은 완성된 채로 나와서 참 쉬어졌는데, 대신 고가형인 산악용자전거(MTB) 등도 나오면서 용어도 낯설고 하다 보니 그런 건 다소 어려워졌어요.” 올해 나이 70에 접어든 이대우 사장이 들려주는 신·구 장단점 비교다.
70여 년 흐르는 동안 탈것(vehicle)은 급속도로 변했다. 우마차~인력거~자전거~오토바이~자동차~전기자동차~수소차~~~ 현재 대교동 삼천리자전거포 건너편에는 오토바이 가게가 둘인데, 둘다 성업중이다. 거기에서는 전기자전거도 취급한다. 이대우 대표에게 ‘전기자전거도 취급해보라’는 영업이 들어왔지만 거절했단다. 이제는 바통을 받을 3대나 자전거포 기술 배우겠다는 자원자가 나서지 않으니 예전 하던 대로, 하는 데까지만 해보겠다는 심산에서였다.
자전거는 인류7대 발명품 중의 하나이다. 인류의 보족(補足)인 자전거는 직접 두 다리로 페달을 밟음으로 해서 근육을 보해주는 스포츠로서도 각광이다. 근간 김진호 시의원 자서전에 의하면, 그는 1999년 제1회 환경보전 자전거타기 대행진 대회 대회장으로 행사를 진행하였다. 이 대회는 10회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자전거길을 큰 업적으로 내세웠다. 자전거 봉사단체 중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행복도시 자전거순찰대’는 세종시민의 안전은 물론 자신의 건각을 동시에 지켜주고 있다.
논산에서 자전거붐 뉴스는 쉬 포착되지 않는다. 기자는, 논산의 자전거 동호회 같은 데와 제휴해 보았는지 궁금했다. “자기네끼리 알아서 인터넷 공동구매 하고 하니까 우리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이 대표는 말을 자른다. 학습력이 뛰어난 신세대들은 전문용어도 즐겨 쓴다. 나이든 자전거포 주인과 대화하다 보면 막힐 때도 있다 보니 현재 주고객은 시골노인, 동네사람들이다. 손수레 리어카도 여기 와서 손을 보긴 하지만, 요즘은 시골서도 리어카 잘 쓰지 않는 편이다. 이래저래 자전거쪽은 사양길이기에, 예전 그래도 장사가 잘 됐던 이야기가 더 편한지 대교동 주변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화양조장, 토지개량조합, 기민중학교 시절 이야기다. 1700평 규모의 대단지 조화양조장의 술도가 냄새도 가시고 주변을 둘러쌌던 싸전도 들어갔지만 그때 그시절 이야기는 남는다. 곡창지대 논산의 쌀을 이용한 조화(朝花) 청주는 전국 최고의 청주 공장이었다.
1915년 일본인 니시하라가 논산에 조선주조(주)를 세운 뒤 ‘조화(朝花)’ 상표를 단 청주를 생산했다. 청주(정종) 주문이 늘어나자 1917년 군산에 조선주조 군산분공장이 설립된다. 그러니 군산근대화거리의 유산들도, 역사적으로 보면 논산의 분점격이다.
요즘 청주(淸酒), 정종 하면 백화(白花)수복지만, 당시 조화는 백화의 두 배 규모였다고 한다. 백화는 1952년까지 논산의 조선주조와 함께 ‘조화’ 상표를 공동 사용하다가 1953년부터는 ‘백화(白花)’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조화’ 인지도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백화 상표 아래 ‘구 조화’를 새겨넣어야만 했을 정도다.
세월이 흘러 논산 ‘조화’도 문을 닫았지만, 일본인이 만든 회사인지라 술통 말리는 공장 한 켠에 신사(神社)가 한 채 있었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인 관광버스가 와서 신사 참배를 하였다는데, 그 신사를 비롯한 조화양조장 건물 자체가 폐허상태다. 빨간 벽돌로만 남아 있는 공간들은 자칫 우범지역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주변에서는 걱정들이다.
부여쪽에서 뻗어오던 ‘백제대로’는 논산천 논산대교를 건너면서 이름이 바뀐다. ‘중앙로’ 이름 그대로 논산의 중앙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길이다.
이 길은 논산 사거리, 오거리를 거치며 건양대학교 송전탑에서 막힐 즈음 좌우로 길을 내주는데, 예전의 번영과 영화마저도 함께 내주는 듯싶다. 대부분의 차들이 외곽도로로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논산신대교에서는 연무대 ‘득안대로’, 그 옆 놀뫼대교는 강경 ‘강변로’로 빠져나가면서, 대교동 중앙로는 4차선대로 시내길이지만 여늬 한적한 시골길 분위기다. 아주 커다란 골목길이다.
논산천도 세월 따라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요즘 새 다리(新橋)를 놓기 위해 한창 공사중인데, 이 논산대교를 예전에는 ‘새다리’로 불렀다. 새다리 밑에는 서커스단이 들어오곤 했다. 새다리 위에는 차보다 자전거가 줄을 이었다. 50여 년 전 당시 통학과 출퇴근은, 대부분 따르릉 자전거였다.
장날이면 새다리에 장사꾼들이 판을 쳤다. 쌀을 싼 값에 먼저 사기 위해서였다. 다리 건너자마자 시내진입로 좌우는 대부분 미방(米房)이었다. 싸전, 쌀가게다. 방앗간이 4개나 우뚝했다. 좌측으로 중세 성처럼 붉은 벽돌로 치솟은 조화(朝花) 양조장이 우람했다. 빨간벽돌 아래 하수도물은 허연 구정물이었다. 양조장에서 줄기차게 씻어내던 쌀뜨물이었다.
우측으로는 토지개량조합이 있었다. 거기 데보뚝 밑으로 접골원이 있었으며, 그 축대 밑으로가 기민중학교 운동장이었다. 학교가 떠난 자리는 공원녹지로 토개공이 인수하여 분할하였고, 현재 일원을 보면 정식건물에서부터 가건물 하우스까지 어수선해 보인다.
자전거포에서 시작된 취재가, 논산시민의 힘으로 세웠다는 사립 기민중학교의 변천사로 이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우선하는 것은, 그때 그시절 조화양조장의 흥망성쇠다. 군산이나 전북일보 같은 데에서는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백화양조” 식으로 청주 공장을 도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청주(淸酒)는 쌀로 빚는 양조주다. 맑은 술이다. 일제강점기에 청주는 일본식 표현인 ‘정종’으로 불릴 뿐 아니라 일본 전통주로까지 둔갑하였다. 우리 전래의 술로서, 일본에 전래된 술인데도 말이다. 그 청주 공장이, 그것도 대한민국 최대의 청주공장이 논산에 있었다. 논산 하면 다 알아주던 남성성냥공장..... 전국을 풍미했던 논산의 문화유산들이 어떻게 팽개쳐지고 있는지, 참혹한 폐허지에 대하여 논산시 문화재 담당자들은 몇 번 와 봤는지, 와서는 어떤 생각, 어떤 느낌 혹은 감회일지 급궁금해진다.
“조화양조장은 빨강색 담벼락에 높게 드리워져 우리네는 넘나보기 힘든 곳이지. 그 안에서 무슨 공정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으니.. 가끔 가다가 공장에서 바로 밑 도랑으로 흘러나오는 물이며 밀 저울 같은 술냄새가 풍겨 나오곤 했지.
우리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도 명절 때면 조화나 백화수복 한 병씩 사들고 올 때가 있었다네. 윤석규 어르신은 그 조화회사의 이사로 있었다고 했고, 50CC 회색 오토바이를 타고 매일 출근하던 기억도 나네. 상호 아버지는 오랫동안 근무한 측에 들어가지만, 많은 동네 형들이 잠시 일하다 나오곤 했는데 힘들었던 모양이라. 상호 아버지는 밀저울이라고 하나 그런 무거운 것들 들어 나르는 일을 했다면 풀때밥 먹고서 견디기가 힘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말하자면 상호 부친은 그 중에서도 상위보직을 유지했으니 일본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지 않았나 싶다....”
조화양조장을 추억하는 성동면 출신 양현광 씨의 기록이다. 이 정도의 기억, 기록이 시내 안팎에서 쌓여가면 조화양조의 퍼즐도 완성도가 높아질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