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암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기
지난 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서 낭보가 날아왔다. 논산의 돈암서원을 비롯한 9개소 ‘한국의 서원’이 세계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했다는 빅 뉴스였다. 이로써 돈암서원은 석굴암과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에 이어 국내에서 14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극하였다.
한국서원의 세계문화유산등재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향토사요, 동시에 세계사적이다. 2011년이 시작이었다. 논산시가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인 ‘한국의 서원 통합보존관리단’ 이배용 이사장과 논의를 시작한 이래 2015년에는 자진 철회.... 2018년 1월 재신청과 9월 실사를 통과하여 2019년 7월 도저히 못 이룰 거 같던 목표지점을 마침내 관통해간 것이다.
황명선 시장과 이배용 위원장은 수 차례 만나면서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꿈을 키워나갔다. 2015년 9개 서원과 관련한 자치단체들이 상호 협조하여서 1차 등재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이코모스)의 현지실사와 전문가 패널회의 결과 ‘한국의 서원’이 가진 독창성과 9개 서원으로 구성된 연속유산으로서의 연계성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반려’ 의견을 받았다. 문화유산은 한번 공식 신청했다가 떨어지면 재신청이 어렵다는 현실 앞에서 일단 자진 철회 절차를 거쳤고, 이후 각 서원별로 지적 사항들을 수정 보완해나가기로 하였다.
진행 도중 9개 서원 중에서 논산은 제외하고서 재신청하자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돈암서원은 원래 있던 장소에서 이전을 했고, 주변 환경도 개발된 상태라 한국의 서원으로 감점 요인이 많아 보인다는 이유에서였다. 2017 이코모스 최종보고서 주요 내용은 부정적이기도 했다. “돈암, 무성, 남계, 도동서원은 주변에 현대식 거주지와 건물에 둘러싸여 있다. 돈암, 남계 서원은 서원 내에 신규 시설을 건립했다. 돈암서원은 배향자인 김장생의 묘를 서원 내에 포함하지 않고 있다.” 진정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로 지적받은 사항 중에서 외적인 환경 조성은 지자체가, 무형문화 관련해서는 돈암서원측이 나누어서 해결해나갔다.
돈암서원은 산앙루 담장철거 및 홍살문 이전, 경관 저해 요소인 소방펌프실 이전, 화장실 및 전면 공장지대 차폐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이런 변경사업을 승인받기 위해 논산시는 문화재청 담당부서를 수차례 방문해야 했다. 그 결과 실사팀이 요구하는 작업 사항들을 2차 돈암서원 정비사업에 반영할 수 있었다. 2차균형발전사업은 2016년 준공되어야 했음에도, 사업 지연에 대한 부담을 안고 2018년까지 연장하여 추진하였다.
타 서원은 이미 정비가 끝나서 안정기에 접어들었는데, 돈암서원 주변의 경관회복은 더디기만 했다. 문화 유산으로 손색이 없기 위해서, 1년여 설계 및 준비 기간을 더 거친 다음 공기단축으로 인한 부실 공사가 되지 않도록 꼼꼼히 챙겼다. 작년 9월 이코모스 현장실사 당시에도 돈암서원은 여전히 공사중이어서 어수선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고사항의 충실한 실행을 전제로 하는 조감도를 펼쳐 보이고 질문마다 상세히 응답하는 등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논산시의 의지를 보여주었더니 현지실사측도 고개를 끄덕였다고 술회한다.
돈암서원은 강학 건축물의 탁월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각 건축물의 현판과 목판 등은 예학(禮學)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응도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서원 강당으로, 유교적 고례를 재해석해 완성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돈암서원에는 현재 보물 제1569호인 응도당과 사우, 장판각 등의 건물과 하마비, 송덕비 등이 남아 있으며, ‘황강실기’, ‘사계유교’, ‘상례비요’ 등의 서적들이 보존돼 있다.
돈암서원이 외적 인프라에서 얻지 못했던 고득점은 소프트웨어격인 운영면에서 보충하였다. 공립교육기관인 성균관과 향교는 과거 시험을 염두에 두고 지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이에 비하여 사립학교인 서원은 지식교육은 물론 인성(禮)교육에 비중을 더 두었고 사우(祠宇) 성격도 강했다. 돈암서원은 서원의 기능을 현대적으로 되살려냈다. 각종 미디어를 통한 홍보 기능 강화는 물론 돈암서원만의 다양한 문화 체험 콘텐츠를 집대성하여 전국적으로 서원활성화 사업의 모델이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돈암서원은 세 번 기사회생한 셈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도 살아남았고, 대자연의 홍수도 피하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서는 자칫 1차 시험도 못 치룰 뻔하였다. KBS 대전은 부여의 정림사지가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어도 썰렁하다면서 돈암서원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일리는 있다. 이런 염려를 모두 불식시키려면 서원 운영의 묘이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새로운 시작”
논산 노성에 첫 삽을 뜬 충청유교문화원이 민관(民官)의 합작품이듯, 돈암서원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민·관 쌍두마차가 보조를 맞추어서 이끌어낸 회심작이다. 지금까지 절치부심하면서 유네스코 등재라는 쾌거를 이루어낸 일등공신으로 김선의 돈암서원 장의를 지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차제에 그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일문 일답으로 들어본다(경어체 생략).
세계유산등재 공식 발표까지 누구보다도 조마조마했겠는데, 처음 얘기부터 거슬러간다면....
2011년 돈암서원을 포함한 한국의 9개 서원이 유네스코에 잠정 등록되었고, 나는 그 다음해인 2012년 처음 돈암서원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때까지 살아온 세상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이라 어리둥절하여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였는데, 김용숭 당시 원장님이 지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면서 유네스코 등 대외업무를 내가 맡게 되었다.
기존의 세계유산추진위원회가 조직되어 있었고, 이미 서원에 대한 역사자료 등 책자가 만들어지고 있던 때였다. 나는 열심히 돈암서원 자료를 공부하며 이곳저곳 회의에 참석하고 지시하는 대로 논산시공무원들과 함께 서원정비사업 등을 수행하면서 유네스코 실사에 대비하였다.
2015년 어떤 암초에 걸렸나?
2017년 유네스코 등재를 목표로 준비하였었다. 그러나 2015년말 유네스코에서 “한국의 서원이 등재되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소식에 스스로 신청을 철회하고 재수에 들어갔다. 여기에는 한국의 서원들이 유산구역과 완충구역을 너무 좁게 설정해서 개발의 위협이 염려된다는 지적과, 돈암서원의 이전(移轉)에 대하여 서원의 진정성이 의심된다며 보강 서류를 요구하였다.
나는 서원에 대해 잘 모를 뿐 아니라 전문위원들이 서류를 작성하였기에 그 내용만 열심히 숙지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돈암서원 때문에 유네스코 등재에 걸림돌이 된다 하니 모든 게 내 탓인 양 고민이 시작되었다. 회의에 참석해도 눈치만 보이고 자꾸 의기소침해졌다.
그때 추진단장인 이배용 전 브랜드위원장께서 “모든 서원이 합심해서 난관을 돌파하자”고 하시면서 서원관계자들과 지자체 공무원들이 심기일전,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유네스코실사를 대비하게 되었다.
진정성 문제는 어떻게 돌파하였나?
돈암서원은 영남의 서원들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났다. 서원에 관한 고증 자료가 부족하고 사진자료 등도 거의 없었다. 게다가 영남서원들은 산속에 위치하고 있어서 주변 자연과 잘 어울리는 멋진 풍광인 반면, 돈암서원 주변은 개발이 이루어져 서원을 찾는 전문위원들과 예비실사자들로부터 여러 지적을 받게 되니 시공무원들과 함께 풀이 죽었다.
그래도 시작을 한 것이니까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실사를 앞두고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혹 우리 돈암서원 때문에 다른 서원이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데 지장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어떻게든 누가 되지 않게 해야겠다는 각오를 하고 서원 한문 자료를 읽고 또 읽고, 기도도 하였다. 어느날 기도중 나는 귀중한 자료를 보고 소중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돈암서원은 1880년에 근처 1.7km 떨어진 곳에서 현재의 장소로 이전해왔다. 많은 비로 인하여 서원 담장이 차오르고 운영에 지장이 있어서, 단지 그래서 이전했던 것이다. 응도당 건물은 워낙 크고 그 시대 기술로는 이전이 어려워 함께 이전하지 못하다가 1971년도에 비로소 옮겨오게 되었다. “이미 응도당 자리에 양성당이 자리잡고 있어서 원래의 자리로 올 수 없어 진정성이 의심된다”고 하는 것이 그간의 통설이었다. 나는 그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떤 자료를 발견했나?
1854년과 1874년에 논산지역에는 큰비가 왔고 정부에서는 홍수를 선포했다. 지금도 재난구역을 선포하면 세금감면 등 여러 혜택이 주어진다. 당시에도 홍수를 인정해주면 세금을 거둘 수 없기에 홍수를 선포하자면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다. 그런데도 피해가 워낙 크기 때문에 관에서는 홍수를 선포했고, 서원의 장의들은 서원 주변에 방천 사업 등으로 서원을 보호하며 한편으로 서원을 물이 차지 않을 만한 지역으로 옮길 결정을 하게 된다. 그 시대는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전국에 47개 서원만이 살아남은 때라 관에 지원 요청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전답을 팔아 우선 사당과 강당 전사청 등 서원의 필수 건축물만 옮기고 사계 선생을 기념하기 위한 응도당(1634)과 돈암서원의 건축 과정을 기록한 돈암서원원정비(1669년)는 그 자리에 두고 떠났었다.
후에 1883년 사계 선생의 9세손은 양성당 후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지금 양성당과 응도당을 현판을 바꾸어 이전하는 것은 임시 방편으로 하는 것이다(권도에 의함). 그러나 언젠가 유력자가 나타나서 원래의 모습대로 꽃도 심고 연못도 만들고 서원의 옛 모습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이로 보건대, 부득이 서원을 옮기고 때가 되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려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 강점기가 시작되고 서원의 옛 자리에 호남선이 지나가면서 모든 것이 헛되게 된 것을 깨닫고 1925년에 돈암서원원정비를 현 위치로 옮기고 『사계전서』, 『신독재전서』 등을 발간하였다. 1926년 장판각을 건축하고, 나머지 건축물 등을 속속 건축하는 것을 보면서 “천재지변은 나라에서도 다스리기 어려운데 서원의 유학자들이 축대를 쌓고 서원을 옮긴 것이 문제가 된다면 진정 어느 것이 서원의 진정성인가?” 이제는 진정성을 의심하는 이들에게 정면으로 반문할 자신이 생겨났다. 이런 공부로 등재 준비에 더 박차를 기해나갈 수 있었다.
건물도 중요하지만 교육은 어떻게 이어갔나?
돈암서원은 2014년부터 문화재청의 ‘살아숨쉬는 향교·서원’ 공모 사업에 선정이 되었다. 이후 6년째 활용사업을 지속하면서 지역의 어린이집 아이부터 성인들까지 인성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 사실을 불시에 인근학교를 방문하여 보고 확인한 유네스코 관계자들은 호평을 아끼지 않았으며, “다른 서원들도 따르라”는 권유문도 남겼다. 우리는 청소년들 눈높이에 맞추어 홈페이지를 제작, 수시로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있다. “서원이 옛 것만 고집하고 있으면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어떤 감동을 줄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항상 하며, 시대에 맞는 교육을 통하여 선조들이 이루고자 하셨던 정신을 이어받고자 오늘도 고민중이다.
사계선생의 영향력에 과장된 요소는 없나?
돈암서원은 사계 선생이 살아 계실 때부터 수백 년간 기호지방의 으뜸서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 다른 지역의 향교나 서원으로부터 자문을 받으면 친절히 답해주었다. 사계선생의 부친인 황강 김계휘 선생은 여기에 머무시다가 복직되어서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는데, 임금에게 상소하여 경주의 옥산서원에 사액을 요청해주신 분이다. 그 옥산서원은 이번에 유네스코에 함께 등재된 서원 중 하나이다. 장성의 필암서원에 가면 서원 입구 누각인 확연루 현판을 사계 선생의 제자인 우암 송시열이, 강당인 청절당은 동춘당 송준길이 현판을 써주었는데, 이처럼 돈암서원은 지역을 넓혀갔다. 나는 작년 9월 유네스코 실사 때 각본에는 없지만 중국에서 온 정군 박사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 주었다. 다른 관계자들로부터 눈총도 받았지만 기호유학의 본산인 돈암서원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눈치 없는 척하며 주저리주저리 읊어댔다.
한국서원의 유네스코 등재는 대한민국의 경사이지만, 이제부터라고 본다.
나부터 시행착오가 많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제 돈암서원을 포함한 한국의 9개서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당당히 등재되었다. 돌아보면 정말 꿈같은 일이다. 이제 선조들의 뜻을 잘 이해하고 현대에 맞게 서원을 활용해 나가는 일이야말로 서원의 진정성을 회복해가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큰 절을 올린다.
[글·사진] 이지녕
위 글은 『놀뫼신문』 2019-07-10에도 실렸습니다.
https://nmn.ff.or.kr/21/?idx=2074899&bmod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