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호억 개인전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우리 신문사에서 연재하는 [미술이야기] 화가와 친구들-3
그 친구 속에, 내 이름 석 자가 끼었습니다. 취재나 인터뷰를 하기도 하지만, 이번처럼 아주 가끔씩 주객이 바뀔 때도 있습니다. 아주 어쩌다가는 내가 찍혀서 게재되는 사진도 등장하곤 합니다.
이호억! 한국화가라 해야 할지, 동양화가라 해야 할지 경계가 모호합니다. 적어도, 미술에 문외한인 내 눈에는 그러합니다. 그러나 궤도에 진입한 사람들에게 이런 경계는 무의미할 거 같습니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경계도 마찬가지인 듯싶네요~ 반 고호의 꿈틀거리는 그림이 내뿜는 에너지가, 극동지역 어느 한국화가 하나와 맞닿아 있습니다. 두 그림을 번갈아서 보면, 긴 설명이 필요없을 거 같습네요~~
서양, 동양(중국), 한국~~ 이렇게 상호 연결되는 일맥상통(一脈相通)은 동시대인이나 스승과 제자 사이가 아닙니다. 짜고 치는 고스톱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우주적 언어(universal language)는 알아서 소통하는 듯합니다. 그 교감을 위하여 3편의 글을 모셔옵니다. 전반부 두 개는 최근걸로, 나머지는 시간이 좀 된 것으로 소환합니다. 길으니까 첫 번째것까지만 눈길을 주어도 좋아요. 다만 이런 말은 덧붙이고 싶습니다. “예술하는 분들은 글을 참 잘 쓴다. 글짓기 기교는 기본이거니와, 특히 내용의 알참에서....”
[도입글] 이지녕
아래 글은 『놀뫼신문』 2019-07-03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미술이야기: 화가와 친구들] 3. 이분법 아닌, 홀로 마주하는 나와의 대면과 물음
https://nmn.ff.or.kr/23/?idx=2056842&bmode=view
[미술이야기: 화가와 친구들] 3
한국사회에 팽배한 이분법적 인식들. 서양과 동양,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서울과 지방,강남과 강북, 여성과 남성, 예비역과 비예비역, 우월함과 천박함, 선과 악 등등... 섬나라 반도의 세계관은 획일적이고 모든 것이 이분법으로 예측 가능한 선상에서 이해되었다. 자신이 속한 위치에 따라 계급과 동료와 적이 설정되는 필연적 사회구조가 한국사회의 병폐다. 이러한 사회구조에 반문하는 만남과 대화가 미술관에서 열렸다.
지난달 21일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에무”에서 김영종 관장의 사회로 세 시간 동안 작가와의 대화가 진행되었다. 복합문화공간 “에무”는 조선의 궁궐 회상전이 있던 곳이다. 회상전은 영조가 잉태된 곳이다. 이곳에 세계적인 실크로드미술의 권위자인 한국예술종합학교 권영필 교수와 고려대학교 주수완 교수 그리고 뉴욕 독립큐레이터 김유연 선생님이 모였다. 작가의 은사인 중앙대 김선두 교수와 중앙대 철학과 유권종 교수도 자리했으며, 고향에서 큰 걸음 해주신 놀뫼신문 이진영 기자님도 볼 수 있었다. 미술계의 원로이신 성완경 선생님을 비롯하여 선후배, 제자들이 모여 작가의 작품을 주제로 과거와 오늘과 미래를 아우르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작가의 작업이 시공을 초월하여 실크로드미술과 7세기 당나라 화가 울지을승의 작품과 유사 지점이 발견되어 소개되고 논의되었으며, 그 논의 중 하나는 요철법과 굴철반사다. 요철법은 자연에서 드러나는 음영을 잡아내려는 노력 속에서 태어나며 굴철반사는 누에의 실처럼 일정한 선을 굴절시키고 철사처럼 단단하게 사용하는 기법을 뜻한다. 울지을승의 요철법과 굴철반사의 유사외형은 고호와 같은 자연을 탐구하는 화가의 작품에도 특징으로 드러나는 지점이다.
여기서 뉴욕 독립큐레이터 김유연 선생님은 내 작업의 ‘사적 입장’에 주목하며 뉴욕 미술계에서의 가능성을 점쳤다. 내 작업은 개인적인 사건과 감정으로 출발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어떠한 집단에 소속되어 필연적 입장을 확보하는 것이 아닌, 자연 속으로 들어가 절대적 고립을 추구함으로써 개인적 입장을 확보하고 개인적 목소리를 찾는 것에 힘썼다. 바로 그러한 지점이 나와 울지을승을 만나게 했던 것은 아닐까.
화가는 외로운 존재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고독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다. 작가가 기어이 고독의 바다로 침전하는 까닭은, 그 속에서만 우리 세계를 바라보는 진실의 눈을 뜰 수 있는 탓이다. 진정한 화해와 용서는 내가 믿는 진실과 아집에 저항하고 의심하고 투쟁함으로 가능한 일이다. 나를 둘러싼 껍질과 집단이 아닌, 이분법의 악령이 아닌, 홀로 마주하는 나와의 대면. 그리고 이어지는 삶에 대한 물음이 예술이 예술일 수 있게 한다.
이호억(중앙대학교 객원교수)
아래 글은 『놀뫼신문』 2019-05-22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미술이야기: 화가와 친구들] 2.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https://nmn.ff.or.kr/23/?idx=1930821&bmode=view
[미술이야기] 화가와 친구들-2
나는 주로 제주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평화로운 어느 봄날, 사계절 출판사대표이자 복합문화 공간 에무의 관장인 김영종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의 작업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전시를 기획하고자 한다는 말씀이었다. 내가 펼치고 있는 일명 사생수묵(死生水墨) 작업의 핵심은 관념과 인식의 차원을 넘어 자연 속에서 몸으로 발견하는 내면의 얼굴이었다.
나는 사람만나는 것을 애써 즐기지 않았고, 조용히 작업을 해오던 터라 모처럼 관장님의 제안과 말씀이 궁금하기도 했다. 광화문에서 관장님과 만나 식사를 하고 내 그간의 작업을 보여드렸다. 제주로 회귀 후 긴 통화와 늦은 밤까지 메신저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일개 화가일 뿐이었다. 내가 그토록 부정하고 의심하던 한국화의 역사적 책무와 민족에 대한 소명의식의 소환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나는 선생께서 언급하셨던 7세기 당나라화가 울지을승(尉遲乙僧)을 알지 못했으며 그가 사용하는 요철기법도 들은 바 없다. 마음이 아팠다. 내 작품을 지켜보고 새로운 면을 발견해주신 관장님께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지만, 무언가 상실했던 것. 내가 알지 못했던 역사와 마주하여 마치 이산의 아픔 끝에 포기와 자립을 택했던 나를 두들기는 수수께끼 같은 감정에 울렁임을 진정해야 했다.
‘尉遲乙僧.’ 지필묵을 들어 그의 이름을 수차례 써내려갔다. 김영종 관장님은 <실크로드미술>의 저자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를 역임한 권영필 교수와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고려대 주수완 교수와의 만남과 대담을 주선코자 하셨다. 그분들과 내 작품에 대하여 이미 얘기를 나누었다는 말씀도 뒤따랐다. 제주 동쪽 끝 섬마을에 머물던 화가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 만남과 대담이, 그리고 이 전시가 오늘날 한국사회에 유의미한 움직임으로 남아야 했다. 대담에는 뉴욕에서 독립큐레이터로 활동하고 계신 김유연 선생도 참여하시기로 했다. 극적인 소식이다. 이역만리 미국에서 이 전시와 대담을 위해 귀국을 결정하셨음에 숙연했다.
이번 전시와 대담의 큰 주제인 “이호억 작가의 한국화 작품을 컨템포러리 아트에서는 어떻게 평가 또는 해석이 되는가?”이다. 이에 따라 1부에서는 주수완 교수가 <중앙 유라시아 미술사에서의 울지울승의 요철법>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할 예정이고, 김유연 큐레이터가 <왜 한국화에 주목하는가>로 강연을 진행한다. 2부 패널 토의에서는 권영필 교수, 주수완 교수, 김영종 관장, 그리고 김유연 큐레이터가 다시 한 번 “이호억 작가의 한국화 작품을 현대미술에서는 어떻게 평가 또는 해석이 되는가?”를 주제로 활발한 논의를 진행한다.
‘울지을승’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오늘 반도의 한 화가와 어떤 연이 닿아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인가? 김영종 관장의 평을 빌어 이 전시를 소개한다.
[붉은 얼굴]은 ‘뿌리’를 그린 그림이다. 요철의 필선으로 그려진 ‘뿌리’는 작가에게는 미완의 사랑을 상징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랑의 욕망과 요철의 필선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잠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요철법의 화가로는 7세기 서역 사람 울지을승을 꼽는다. 그래서 요철법을 서역화풍이라고도 한다. 중국에 들어와 일세를 풍미하고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거장이다. 그는 불화를 그렸는데, 주인공뿐 아니라 화면 전체가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이 특징이다.
울지을승의 요철법은 간다라미술의 자장 안에서 태어났는데, 불상 중 유일무이하게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있는 [석가모니 고행상]이 원류일 것이다. 문헌에는 울지의 요철화법이 ‘굴철반사’(屈鐵盤絲)를 특징으로 한다고 했다. 마치 ‘철사를 구부려놓은’(굴철) 것 같고, ‘실이 말려 있는’(반사)듯하다는 것이다.
아주 쉽게 ‘굴철’의 필선을 알 수 있다. 반 고흐 작품 [별이 빛나는 밤], [의사 가쉐의 정원] 등을 보면 된다. 철사를 감아놓은 것 같은, 나무와 산과 집과 그리고 별들이 있는 정경.
이 고흐 그림은 요철법 중 ‘굴철’이 사용됐다. ‘별이 빛나는 밤’이 어떻게 우리의 망막을 두드리는지 모르지 않는다. 그 앞에서 울지 않을 수 없다. 왜일까? 보지 못하는 우리 능력 너머의 진짜 자연에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고흐의 손에서 흘러나온 굴철의 필선을 통해 넘실대는 우주 에너지를 만나 내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이렇듯 사랑의 욕망과 요철법은 상관관계가 있다. 이호억은 요철법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그가 자기 필선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직접 들어보자.
“나는 입자로 이루어진 분말가루를 으깨고 섞어서 아교액과 배합해 그린다. 선이라는 명료한 구분의 장치가 아닌 입자로써 살아서 움직이는 감정을 묻혀내려는 의도 탓이다.”(작가노트)
바로 이 필선이 요철법을 표현하는 것이다. (지식에 구애 받지 않고) 그만큼 몸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반증이다. 이 작가의 정념은 명료한 구분을 가져오는 선에서는 충족되지 않는다. 가루가 묻어나는, 캔버스가 아닌 종이 위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감정’을 표현하려는 작가다. 굴철이 주도하고 반사로 채워나가는 붓질에서 ‘생명의 음양 관계’를 보인다.
이호억이 제주도로 가서 ‘위리안치’로 감정이입한 추사에게서 위로를 얻고자 그 유배지를 절실한 마음으로 배회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모르나 ‘붉은 얼굴’ 필선을 보면 추사의 [세한도]가 떠오른다. 허나, 형태는 비슷하지만 전혀 성질이 달라서 분별하는 게 중요해 보인다.
위상수학에서는 구멍이 하나 난 도너츠는 같은 제과 종류인 찐빵과는 위상이 다른 반면, 도자기류인 손잡이 달린 컵과 위상이 같다. ‘붉은 얼굴’은 ‘세한도’와 같은 통속으로 눈에 들어오지만, 처한 처지도, 분노의 성질도, 추구하는 세계도, 표현기법도 전연 다르다. 추사 그림은 그 절창의 수준과 상관없이 보이지 않는 땅 속 뿌리의 욕망보다는, 보이는 세계의 성쇠가 우리를 압도한다. 니체를 빌리면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적인 차이다.
울지을승의 요철법은 고려불화에도 이어졌는데, ‘필의가 흐르는 듯하고 무척 섬려하다’고 원나라 탕후의 <화감>에도 나와 있다. 이로 볼 때 요철법은 불성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필법이 아닌가 한다.
이호억은 불성이라는 북극성을 발견하고 망망대해를 항해하고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태평양을 바라다보는 제주도에서 작업하고 있다. 바위를 움켜쥔 뿌리의 구애가 ‘오래된 미래’의 요철법으로 구체화되고 있는 한편으로, 작가는 더 벼린 비수를 품고 항해선 위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침 꽃을 저녁에 줍는다.
<출처 : 김영종, 아침 꽃을 저녁에 줍는다>
[복합문화공간 에무 기획초대전 이호억 개인전]
전시장소 : 복합문화공간 에무(서울 종로구 경희궁 1가길 7)
전시기간 : 2019년 6월 4일(화) ~ 7월 5일(금)
작가와의 대화 : 6월 21일(금) 오후 3시_복합문화공간 에무
입장료 : 무료(매주 월요일 정기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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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호억 “예술은 기교가 아니라 생각의 가치체계”
https://nmn.ff.or.kr/23/?idx=514377&bmod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