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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Jan 30. 2022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소년전홍」(小年剪紅)

우리 문학-그림 이렇게 보기(22)


소년, 붉은 꽃을 꺾다






 「소년전홍」(小年剪紅)은 화면 우측 상단의 화제(畵題)에서 따온 제목으로 추정된다. ‘密葉濃堆綠, 繁枝碎剪紅(빼곡한 잎마다 초록빛 짙게 쌓이는데, 숱한 가지마다 붉은 꽃잎 떨구네)’에 ‘剪紅’이 있고, 그림 안에는 소년이 있다. 화면 안에는 정말 붉은 꽃이 번득이듯 피어 있는데, 모두 여름철에 피는 목백일홍(배롱나무 꽃)이다. 화제대로 화면의 왼쪽과 오른쪽 아래에는 초록 잎사귀 가득한 나무와 붉은 꽃들이 난만하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계절은 한여름이다.


 화면 중앙에 두 남녀가 있다. 장죽을 든 앳된 남자는 왼손으로 여인의 오른손을 잡아끈다. 하지만 여인은 한 손으로 트레머리가 헝클어질까 붙잡은 채 엉덩이를 잔뜩 뒤로 빼고 뿌리치려 하고 있다. 남자의 오른발과 왼발의 간격과 구부러진 각도로 보아 그도 힘을 다해 끌고 있지만, 여자 또한 왼다리로 땅을 디디고 오른다리에 힘을 줘 버티고 있다. 남자의 마름모 모양 다리와 여자의 활 모양으로 휘어진 몸이 둘의 역동적인 내면 풍경을 보여주는 듯하다.


 둘의 얼굴은 이들이 서로 버티고 선 사연이 다툼이나 싸움이 아님을 말한다. 남자는 화난 얼굴도 아니고, 우악스럽게 찡그린 얼굴도 아니다. 여자도 분노해 상기된 표정이 아니며, 안간힘을 쓰면서 비틀린 얼굴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남자도 여자도 두 손을 다 써서 대응하지 않고 있다. 만일 이들이 싸우는 중이라면 갖고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부닥쳤을 것이다. 확실히 둘의 갈등은 전면적이라기보다 부분적이다. 이끄는 남자의 완력과 뿌리치는 여자의 힘이 균형을 맞추면서 미묘한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다.


 여인의 뒤쪽으로 기이한 형태의 바위가 서 있다. 그녀의 구부린 몸체의 선과 비슷한 윤곽을 그리면서 바위도 화면 안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바위 표면에 얼기설기 구멍이 난 듯한 모양도 특이하지만, 그보다 더 놀랍고 비현실적인 것이 바로 여인과 닮은 자세이다. 마치 바짝 긴장한 채 웅크리고 있는 어떤 동물을 떠올리게 한다. 바위는 호락호락 이끌려 가지 않으려는 여인의 보호자인 듯한 느낌을 준다.


 남자의 뒤에는 담이 있고 그 위에는 삐죽삐죽 풀이 자란 흙무더기가 쌓여 있다. 흙벽돌을 쌓은 모양과 그 위 흙더미의 상태가 정갈하지 않은 걸로 보아 잘 관리된 담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담장은 남자의 뒤에서, 남자가 여자를 끌고 가는 방향을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이 여인을 힘들여 끌어서 그 담장 안쪽으로 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대문까지는 없더라도 담 자체가 남자가 선 자리쯤에서 끊어진 점이다. 이를 어떤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이부탐춘」에서 보듯 담장 아래 구멍으로 짐승이 드나드는 데에 따라 마당의 색깔까지 구분해서 그리는 신윤복의 사실적 화풍에 비추어 실제로 담이 끊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이 남아 있는 담장의 부실한 관리 상태에 부합하는 타당한 해석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이 앳된 남자의 행색은 양반이나 적어도 부유한 집안의 자식은 아니다.


 이처럼 화면 중앙에서는 두 남녀가 서로 대응하여 한 사람은 이끌고 한 사람은 버티고 서 있다. 또 그들의 뒤로 각각 괴석과 담장이 있어 이들의 자세와 의도에 호응하면서 화면 전체에 긴장감을 더해 주고 있다. 그리고 괴석의 옆에서 뒤쪽으로 곧게 선 배롱나무 두 그루가 꽃을 피운 채 섰다. 어쩌면 여인의 꼿꼿한 기상을 표상하는 느낌을 준다. 반대로 남자 쪽에서 우측으로 뻗은 나무는 선 위치가 좀 더 멀어서 가지 끝의 구불구불한 모양이 돋보인다. 마치 뒤엉킨 칡넝쿨처럼 여인을 갈구하는 남자의 내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배롱나무는 그 껍질이 매끈하다. 그래서 ‘나무껍질이 매끈하여 원숭이도 미끄러진다는 뜻’의 후자탈(猴刺脫)이라는 별칭이 있다. 그렇다면 소년의 유혹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화면 왼쪽에 곧게 선 배롱나무와 오른쪽 아래 구불구불한 나뭇가지는 이들의 현재 심사만 대변하는 게 아니라. 둘 사이의 엇갈린 결말까지 함축하는 듯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신윤복이 적은 화제로 돌아가 보면, “빼곡한 잎마다 초록빛 짙게 쌓이는데, 숱한 가지마다 붉은 꽃잎 떨구네”와 같이 역시 꽃은 떨구어졌는지 모른다. 자연의 식생이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이우는 것과 같이 이 앳된 남자도 공을 들이고 노력을 다했으면 기회가 주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림이 보여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들의 긴장된 대치 혹은 뜨거운 밀당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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