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국의 「패악이라면 패악이겠지만」
우리 문학 이렇게 읽기(24)
"그것은 ‘울력’이다"
아낙네의 사타구니를 훑듯, 코로 주둥이로 밭고랑을 뒤지던
산짐승을 내동댕이쳐 놓고, 서부영화의 총잡이처럼
총구를 훅 부는 사내의
떡 벌어진 어깨 너머, 진저리를 치듯
목덜미를 떠는 멧돼지의
눈알이여, 그 어디서 눈 맞췄던 굶주림이냐, 패악이라면
패악이겠지만, 마을 회관 앞마당에 와서 헐떡거리는
뜨신 숨이여, 나더러 어쩌라고, 붉은 피를
콸콸 쏟는 발버둥이여, 패악이라면
패악이겠지만, 사내들은
서둘러 팔을 걷어붙이고, 아낙네들은
잰걸음으로 국솥에 물을 끓이는, 눈 덮인 내설악의
초겨울 오후
- 오정국(1956- ), 「패악이라면 패악이겠지만 - 내설악일기(日記)•1」 전문
산골에 사는 보람이 있다면, 그것은 청량한 공기와 심산(深山)의 산수화적 풍경이 아니다. 도시민의 고단한 삶의 대체재라거나 피안과 같은 허상의 순수가 아니다. 그것은 울력이다.
그것은 목숨을 건 멧돼지와의 필사적인 싸움을 이끌어 가는 사내들의 팽팽한 긴장이라거나 격렬한 근육 운동이다. 또한 짐승의 ‘헐떡거리는 뜨신 숨’을 느끼며 꿈틀거리는 발버둥 곁에서 흥겹게 ‘국솥에 물을 끓이는’ 울력이다.
‘눈 덮인 내설악’, 사람들은 지금 혹한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한판 격정의 생동감을 보여주고 있다. 혹은 ‘패악이라면 패악이겠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긴장과 활력의 에너지 넘치는 한 장면이다. 이로써 우리는 산골에 사는 보람이면 보람대로 그것에 대한 선망이면 선망대로 생의 빛나는 한 순간을 경험한다.
백두대간의 겨울은 산간 마을 사람들을 안으로 더욱 결속하게 하고, 그 결속을 통해 다시 경험과 생각을 근접하게 한다. 이 같은 근접은 이심전심의 공동체를 만들어 주고 다시 한겨울의 울력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하여 「패악이라면 패악이겠지만」은 도시민의 삶을 사는 오늘날 한 세대 앞선 우리들 기억의 원형 혹은 행복했던 삶의 현장까지 힘차게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