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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May 10. 2022

금은돌의 「리좀 ― 2017. 7. 15 전시에 부쳐」

우리 문학 이렇게 읽기(33)

  안성이 떠돈다 흔들린다 안성에 사는 내가 마산에 있는 갤러리 ‘리좀’에 도착한다 안성이 펴진다

  나무를 그린다 낯선 지명을, 긋는다 캔버스 틀을 짜기 위해 화방에 들른다 다 그린 거 맞나요? 

  그는 틀 안에서 자른다 나뭇가지에 앉았던 바람을, 새의 발톱이 가로채던 먹잇감을

이웃나무에서 다투었던 새의 부리를, 도로변에 들어서지 못한 물소리 개미소리를 자른다 

  잘린 것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 입술 안에는 금방 뱉어내고 싶은 비밀이 가득하다 

아저씨는 규격으로 본다 액자 안에 꽃을 담고 구름을 담고 바다를 담고 규칙을 담는다 

  나무는 어디에 있나 솜털에 겨드랑이에 손으로 물감을 뭉개었던 손톱 아래 

나무가 머무른다 씨앗을 뿌린다 파라핀유가 코끝을 간질일 때 나무가 자란다 

바깥으로 바깥으로 나무가 달린다 가지를 뻗는다 잎사귀가 자란다 파랗게 파랗게 탈출한 

  꽃이 입술을 벌린다 도주한 꽃이 바다로 길을 만든다 그래 도망이다 도망가자 탈출이다 탈출하자

  저 나무가 빵을 얻으려고 해 기쁘다 저 돌이 바다를 향해 뛰어들려고 해 기쁘다 

  파란 하늘에 감정을 칠하는 일 뜻밖의 돌, 뜻밖의 산책로, 뜻의 바깥에서 의미를 저지르듯이, 뜻밖의 들판에 비 내리고 

  뜻밖의 비 맞으며 잎사귀 태어난다 

  새로운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면 안성이 죽는다 

  안성은 안성이 아니어야 한다 금은돌은 금은돌이 아니어야 한다

- 금은돌, 「리좀 ― 2017. 7. 15 전시에 부쳐」 전문


  ‘리좀’, 들뢰즈 철학의 근본 개념이다. 들뢰즈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동명의 논문을 썼지만, 금은돌은 15행의 짧은 시로 표현했다. ‘안성’이라는 주어가 ‘떠돈다’와 ‘흔들린다’라는 술어를 만났다. 떠돎과 흔들림의 인접성은 환유적이지만, 이 둘의 유사성은 또한 은유적이다. 환유와 은유는 구별되지 않는다. 왜 안성인가? 그곳은 시인이 살던 곳, ‘安城’이다. 주어와 술어의 불일치 혹은 불균형이 날카롭게 번뜩인다. 이것부터 리좀이다. 리좀은 일치와 균형을 모른다. 그렇다면 안성은 푸른빛인가 붉은빛인가. 마산은?


  안성과 마산은 못해도 300km는 떨어져 있다. 그래도 안성을 펼치면 마산에 도착한다. 이것도 리좀이다. 리좀은 계량화된 거리를 모른다. 규칙화된 시간을 모른다. 리좀은 접힘과 필침의 분리되지 않는 운동이다. 연이은 행들에서 보이는 표현들, 나무로 그리는 낯선 지명, 틀에 의해 잘려나가는 바람과 새의 먹잇감, 새의 부리, 물소리와 개미소리. 이처럼 ‘아저씨의 틀’(규격, 코드, 규칙)에 의한 ‘잘려나감’의 우발성, 물가치성, 불규칙성 또한 리좀적이다.


  또한 나무와 머무름, 나무의 씨 뿌림, 나무의 자람이라는 주술 구조도 금은돌의 의식적인 리좀적 표현이다. 주어와 술어의 긴장이 팽팽하다. ‘틀’ 바깥으로 혹은 틀 바깥에서만 진정으로 달리고 뻗고 자라는 나무와 그것의 잎사귀도 리좀적이다. 틀 안에 있는 것은 어떤 것도 리좀적일 수 없다. 그러므로 금은돌은 나무가 빵을 얻으려고 하고 돌이 바다를 향해 뛰어들려고 할 때 진정한 기쁨을 누린다. 뜻밖의 돌, 뜻밖의 산책로, 뜻밖의 들판, 뜻밖의 비, 뜻의 바깥에 진짜 뜻이 있다. 금은돌의 「리좀」은 완벽한 리좀의 세계를 추구한 리좀의 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리좀」은 리좀 개념의 설명문인가. 환유와 은유를 구별할 수 없는 것처럼 설명문과 시를 구별할 방법이 따로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일단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면 안성이 죽는다”고 하면서 마침내 “안성은 안성이 아니어야 한다 금은돌은 금은돌이 아니어야 한다”라고 다짐할 때 이 작품은 개념에 대한 설명을 넘어 한 편의 빼어난 ‘리좀 시’로 상승한다.


  안성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이미 안성이 가지고 있는 것을 벗어나야 하고, 금은돌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이미 그가 포함하고 있는 것을 내던질 수 있어야 한다. 자아의 부정(否定)은 비자아가 아니라 자아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버릴 때 새로움이 온다. 금은돌은 「리좀」에서 개념으로서의 리좀을 표현하면서도 개념 바깥의 진정한 리좀적 운동을 열망함으로써 사건의 지평선 위로 번쩍 솟구쳐 올랐다.


  역량 있는 문학 연구자이자 평론가와 시인으로, 화가이면서 예술 이론가로 맹활약하던 금은돌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믿을 수 없다. 그의 표정과 웃음과 목소리와 말투가 너무나 선명하다. 그가 즐겨 입던 옷과 그의 걸음걸이와 그가 매던 가방과 그가 만나던 친우들의 분위기가 또렷이 떠오른다. 정말 그는 떠났는가.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 그가 보여준 시와 평론과 에세이와 그림이 남았으므로 그가 떠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경계를 무너뜨려야 한다. 삶과 죽음을 대립시키는 바로 그 경계를 부수어야 한다. 나누기가 아니라 더하기가 필요하다. 태어남 속에 죽음이, 죽음 속에 태어남이 나눌 수 없는 하나로 존재한다. 그것은 “시작이 곧 종말”이 되는 문학이라는 이상한 제도의 본성과도 닮았다. 창조를 이어 창조를 낳는 문학과 같이 생명을 이어 생명을 낳는 자연 또한 창조이다. 금은돌은 떠난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곁에서 다른 태어남을 준비하고 있다.


  월명사는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날을 기다리며 도를 닦겠다고 했지만, 금은돌이 박사학위 논문으로 연구한 기형도는 “네 파리한 얼굴에 술을 부으면 / 눈물처럼 튀어오르는 술방울이 / 이 못난 영혼을 휘감고 / 온몸을 뒤흔드는 것이 어인 까닭이냐.”(「가을 무덤 - 祭亡妹歌」)라고 탄식했다. 수도(修道)와 탄식의 거리가 이토록 좁다는 것을 나는 금은돌의 죽음 알리는 부음을 통해 깨달았다. 다재다능한 한 시인의 이른 죽음을 이 한 편의 브런치로써 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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