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기욱 Sep 05. 2022

'어렵다'에서 '재밌다'로 - 게이미피케이션

게임은 어려워서 재밌다. 일도 어려움이 재미의 원천이다.

강의를 하다 보면 수강자로부터 매우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어렵네요.'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의미는 아니다.

잘 해보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지만, 그 방법을 스스로가 실천하는 것은 어렵다는 말이다.

이를 쉽게 실현하도록 돕는 것은 컨설턴트의 사명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에서 해방되고 싶어한다.

경제적 해방을 통해 조기 은퇴, 파이어족을 꿈꾼다.


그 생각 속에는 일을 그만두면 행복해 질 것이라는 가정이 숨어있다. 고통과 불행을 만드는 원흉을 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 자체는 행복도 불행도 스스로 제공하지 않는다. 자신의 일에 대한 태도가 행, 불행을 만들어낼 뿐이다.


또한 일을 경제적 수입의 원천으로 보는 시각도 숨어 있다. 틀린 시각은 아니지만, 경제적 수입 외의 것을 보지 못하는 착각이 도사리고 있음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게임과 일의 비교


세상의 모든 두가지는 같은 것과 다른 것을 동시에 지닌다.

게임과 일도 마찬가지다. 먼저 양자의 공통점은 뭘까?


<둘 다 일이다>

머리를 쓰고 근육을 움직여서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축구에서는 골을 넣는다. 목적이 있고, 머리를 쓰고 근육을 움직여서 그 목적을 달성한다.

사냥에서는 잡고자 하는 동물을 목적으로 하고, 역시 머리를 쓰고 근육을 움직여서 목적을 달성한다.

농사를 짓는 일이나, 회사에서 업무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정신적 육체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게임과 일의 공통점이다.


1. 목적을 지닌다.

2. 머리를 쓴다.

3. 근육을 쓴다.


공통점은 크게 3가지다. 매우 원론적인 이야기로 들리지만, 원론적으로 게임과 일은 같다는 의미가 ㄷ힌다.

그렇다면 차이점은 뭘까?




<지불 방향이 다르다>

일을 하면 급여를 지급받는다. 게임을 할 때는 반대로 참여 비용을 지불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일이 훨씬 유리하다.

게임과 일은 본질적으로 같은데 게임을 할 때는 댓가를 내지만, 일을 할 때는 댓가를 받는다.

일이 나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일에서 해방되고 싶어한다.

실은 일이 아니라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무엇이 일을 고통스런 것, 해방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인가?

돈을 벌면서 게임처럼 즐겁게 일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https://www.reuters.com/world/china/china-rolls-out-new-rules-minors-online-gaming-xinhua-2021-08-30



2. 게임화의 원리


같은 일이지만, 어떤 일은 왜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시도할 만큼 재밌는 것일까? 일을 그렇게 게임화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선택한다 - 자율성>


게임이 즐거운 이유는 목적이든 수단이든 행위자가 주체가 되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상위 목적은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의 선택이 맞겨졌을 때 즐거움이 생긴다.


프리미어 리그의 축구 선수들은 축구를 즐기는 것 같아 보있다. 골을 넣었을 때 엄청난 행복감이 내면에서 치솟고 있음을 공감한다.


골대에 골을 넣어야 한다는 규칙은 타인에 의하여 정해져 있다. 경기일정도 정해져 있다. 유니폼도 정해져 있다. 감독이 포지션, 출전여부 등도 정해준다.


그 안에서 경기 중에 공을 이리 찰 지 저리 찰 지는 선수가 정한다.     



<할 수 있다 - 효능감>


패스가 매번 실패하고, 슛이 골대를 빗나가면 게임은 재미가 없을 것이다.

목적을 이루는데 필요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재미가 있다. 한 번 잘 못 찼더라도 다음에는 잘 찰 수 있다는 믿음이 있으면 경기는 계속 재미 있을 수 있다.


인간은 목적 달성이라는 성공을 하고 싶어한다. 골을 넣는 것도 목적 달성이고, 패스한 볼이 상대방에게 적당하게 연결되는 것도 작은 목적의 성공이다. 이러한 성공을 만들낼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는 생각이 들면 그 일은 하기 싫어진다.


성공하지 못할 일에 힘을 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매우 합리적이고 효율을 추구하는 생각이다.





<내가 제일 잘 나가 - 우월감>


상대적 우월감을 추구할 여지가 있어야 한다. 세상에 절대강자는 없다. 어떤 순간, 일정한 규모에서는 그 중 제일이 있다. 인간은 그 중 제일 되고 싶어한다.


시간과 공간을 넓혀서 동서고금의 최고가 되기는 어렵지만, 시공간을 좁히면 항상 그렇게 될 수 있다.

'이번 게임에서는 내가 골을 넣었어.'

'이번 패스는 멋지게 연결됐어.'


'머리 한게 잘 어울려.'

'이 보고서는 최고야.'


사람들은 일말의 우월감을 충족하면서 행복해진다. 게임이든 일이든 이런 기회가 거의 없다면 그 일은 하기싫고 괴로울 것이다. 일 자체가 아니라 우월감을 충족할 여지가 즐거움의 원천이 된다.



<점수가 보인다 - 진도>


사람들은 성장하고 싶어한다. 진도가 보일 때 그 일에 매력을 느낀다. 영어학원을 다니면서 매달 토익시험을 보는데, 점수가 100점씩 올라가면 학원 다니는 일이 재미있을 것이다.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화면에 자신의 레벨과 점수가 표시되지 않는다면 재미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점수를 보면서, '나는 잘하고 있어.' '성장하고 있어.'를 확인한다.


보험회사나, 제약회사의 영업사원들이 매일매일 실적을 그래프로 나타내어 보이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타인과 비교되어 '내가 제일 잘나가.'라는 우월감이 충족되지 못하면 괴로움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타인이 다시 지옥을 만들어주는 상황이다.



<그건 내꺼예요 - 공정성>


내가 차서 들어간 골인데, 다른 사람이 찬 것으로 심판이 판정한다면 축구 게임은 괴로운 일이 될 것이다. 나는 오프사이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심판이 그렇게 선언한다면 역시 억울하고 괴로울 것이다.


내가 보고서를 썼는데, 다른 사람이 칭찬 받거나 상사가 가로채서 공로를 빼앗아 간다면 역시 일할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머리를 쓰고, 몸을 쓰는 것이 고통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머리를 쓰고 몸을 쓴 결과가 공정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것이 고통을 만드는 것이다.






3. 전환의 지렛대


게임화의 원리를 아는 것만으로 일이 바로 재밌어지지는 않는다. 자칫하면 게임마저 일처럼 바뀐다. 누군가 게임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게이미피케이션이 필요하다.



<리더의 노력>


리더는 위과 같은 5가지의 조건을 만들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1) 권한을 부여하여 자율성을 높이고,

2) 적절한 교육 훈련과 효능감 정보를 제공하여 구성원에게 자신감을 부여하며,

3) 최고가 되는 순간을 맛볼 수 있는 적절한 일감을 제공하고,

4) 실력이 속도감 있게 향상되도록 난이도를 조절하며,

5) 성과를 잘 측정하고 그에 따른 보상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다섯가지가 실현되면 일은 곧 게임과 다르지 않은 상태가 된다. 일한 댓가를 지불받으면서도 게임처럼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된다.



https://www.forbes.com/advisor/investing/what-is-leverage/


 

<나의 선택>


위의 다섯가지를 실제로 실현하는 것은 지당하여 리더 또는 조직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보인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이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리더와 조직을 책망하고 원망한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지옥으로 몰아넣는다.


게임과 일 자체가 본질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듯, 위 다섯가지의 조건도 다시 그 자체가 즐거움과 괴로움을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괴로움이나 즐거움이라는 나의 감정은 결국 나를 통해 피어난다.   



1. 아래를 보자

자율성이 부족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하고 있는 일의 하위 수단에 대하여는 무한대의 자율성이 존재한다. 상위 목적에 대하여 나에게 선택권이 없다고 여길 때 자신은 좌절과 무력감에 빠진다.


하위 수단에서 선택의 여지를 발견하면 선택권은 엄청나게 확장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성취를 만들어내면 더 큰 목적에 대한 선택권도 어느 덧 자신에게 찾아온다.


축구선수가 경기 중에 누구에게 패스할 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감독이 누구에게 패스하라고 지시했어도 인사이드로 할 지 아웃사이도 패스할 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2. 좋게 보자

리더가 효능감 정보(너는 이만저만 해서 잘 할 수 있어.)를 잘 제공해 주면 좋지만, 스스로 찾을 수도 있다. 어느 누구라도 절대적으로 못하는 사람도 절대적으로 잘하는 사람은 없다. 스스로 잘 하는 부분을 인식하고 그러니 '해보자. 이번에 못하면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라고 마음을 먹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가능하다.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도 볼을 대포의 속도만큼 차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그가 좌절하지는 않는다. 보다 낮은 단계를 설정하면 스스로는 그보다 잘하는 사람이 된다.



3. 내가 시작이다

우월감은 열등감의 이면이다.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우월감을 충족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열등하지 않다고 여긴다면 이미 항상 우월하기 때문에 타자와 대비하여 우월을 증명할 필요가 없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의 인식으로 만들어지므로 스스로는 이미 세계의 창조주이다. 열등할 이유가 없다.



4. 자세히 보자

속도의 설정도 자신이 하는 것이다. 진도가 덜 나가는 것이 답답한 것은 자신이 설정한 속도에 비하여 덜 나가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준이 되는 속도는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스스로 의식적으로 속도를 설정할 수 있다면, 지루하고 답답함도 조절할 수 있다.


나아가 무언가 시도했다면 틀림없이 달라진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잘 찾아내면 그게 바로 진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진전이 없다고 느끼는 것은 한편 진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뿐이다.



5. 길게 보자

공정함 역시 선택의 여지가 있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상호주의 원리가 작동한다. 시간과 공간의 차이 있을 뿐 결국 공정하게 돌아간다. 시간과 공간을 좁혀서 생각하면 세상에는 불공정한 것 투성이다. 내가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동료는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운다. 공정함을 분 단위나 시간 단위로 나누어 생각하면 세상 불공정하다.


그러나 시간을 1년, 10년 또는 평생으로 잡으면 세상은 제법 공정하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우리 부서 안에서 다른 동료와 비교하면 매우 불공정한 일도 전 세계의 조직으로 사유를 넓혀 생각하면 자신이 그토록 희생자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의 일이 괴로움을 주는 것인지, 즐거움을 주는 것인지는 조직의 제도, 문화, 리더십에 많이 달려있다. 그러므로 모두 남의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의 게임으로 전환할 수 있는 여지는 남겨져 있다.


이렇게 스스로에 달려 있다는 점을 말했을 때 사람들은 '어렵네요.'라는 말을 꺼낸다.

마음 하나 고쳐먹는 것인데 그게 그렇게 어렵다.


그리고, 리더는 이것이 쉽고 재밌어지도록 궁리하고 실현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리더를 만나면 그도 어렵다고 말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직은 시스템인가, 사회적 구성인가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