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나누며 옳음을 만들까?
우리는 왜 이렇게 쉽게 서로 다른 ‘옳음’을 갖게 되는가?
그 답은 거창한 도덕 이론도 더듬어 보아야 하지만 또한 훨씬 더 기본적인 곳도 살펴야 한다. 바로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나누어 인식하는가라는 문제다.
인간이 환경, 즉 외계를 감지해 그것을 쓸모 있는 정보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가지 과정을 거친다. 바로 감지한 것의 구분이다. 나누어 아는 것이다. 모든 신호를 똑같이 느낀다면, 그것은 정보가 되지 않는다. 뜨거움과 차가움이 같다면 위험을 피할 수 없고, 소음과 침묵이 구분되지 않는다면 소통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인식은 언제나 “이것과 저것은 다르다”는 구분에서 시작한다.
성경의 창세기 첫 장면은 이 점을 아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하나님은 먼저 빛을 만들고, 곧이어 빛과 어둠을 나눈다. 그리고 그 나눈 것에 이름을 붙인다. 낮과 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빛을 만들었다’는 사실보다, 빛과 어둠을 나누었다는 점이다. 구분이 있어야 질서가 생기고, 질서가 있어야 세계는 의미를 갖는다.
이 모습은 인간이 세상을 알아가는 방식과도 닮아 있다. 태어난 아이는 처음엔 모든 것을 하나의 덩어리처럼 경험한다. 하지만 곧 빛과 어둠을 구분하고, 색을 나누고, 소리와 침묵을 가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엄마’와 ‘아빠’, ‘나’와 ‘남’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은 단순한 발달이 아니라, 세계를 사용할 수 있는 정보의 공간으로 나누는 작업이다.
철학자들도 오래전부터 이 문제를 붙잡고 있었다. 플라톤은 사유란 곧 세상을 적절한 방식으로 나누는 일이라고 보았다. 잘못 나누면 혼란이 생기고, 잘 나누면 앎이 가능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범주라는 틀로 정리했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머릿속에 있는 범주로 묶어 인식한다는 것이다.
칸트에 이르면 이 생각은 한층 더 분명해진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감각으로 들어온 신호를, 인간의 인식 구조를 통해서만 경험으로 만든다. 다시 말해, 환경은 그대로 들어오지만, 정보는 구성된다. 옳음 역시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현상학자 후설은 이를 ‘구성’이라고 불렀고, 하이데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을 세계를 관찰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로 보았다. 우리는 환경을 분석하기 전에 이미 그 안에서 살아가고, 그 안에서 선택하며, 그 안에서 옳고 그름을 느낀다.
불교의 오온(五蘊)도 같은 이야기를 다른 언어로 들려준다. 외부의 신호는 색(色)으로 들어오고, 그것을 좋고 싫음으로 느끼는 수(受)가 생기며, 무엇이라고 알아차리는 상(想), 그에 따른 반응과 의도인 행(行), 그리고 이 모든 흐름을 ‘안다’고 느끼는 식(識)이 이어진다. 우리가 옳다고 느끼는 판단은, 이미 이 여러 단계를 거쳐 형성된 결과다.
여기서 중요한 대립이 하나 드러난다. 어떤 신호를 구분한다는 것은, 동시에 어떤 범주로 묶는다는 뜻이다. 남자와 여자를 구분한다는 것은, 남자는 남자로, 여자는 여자로 묶는 일이다. A를 인식한다는 것은, A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고정하는 동시에 A가 아닌 것과 나누는 일이다. 구분은 언제나 배제를 동반한다.
그래서 정보의 공간성은 곧 옳음의 시간성으로 이어진다. 무엇을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 무엇이 중요해지고 무엇이 옳아지는지가 달라진다. 같은 상황을 두고도 누군가는 위협을 느끼고, 누군가는 기회를 본다. 옳음은 환경에 그대로 들어 있는 답이 아니라, 우리가 신호를 나누는 방식 위에서 만들어진다.
여기서 공간성이란 생각의 공간을 말한다. 인간이 외계에서 받아들인 신호을 해석하여 생각이라는 거대한 공간의 어디엔가 저장해 두고 있다고 보면, 그 저정해 두는 곳은 공간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나누어진 정보는 시간과 결합하여 옳음을 만들어간다.
이 책 전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옳음은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정보를 공간적으로 나누고 시가적으로 연관하는 각자의 방식이다. 결정하는 생명체가 세상을 나누고 해석하며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 낸 기준이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각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나누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탐색한다.
누가 이 구분을 점검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언제, 어떻게 자기만의 구분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이 책에서 말하는 삼자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