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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망친 곳의 낙원 Sep 15. 2022

[Day71-77] 457 단상 in London

London bridge is down

2022.09.08 ~ 09.14 

엘리자베스 여왕이 서거했다. 


공식적인 서거가 발표된 그날 저녁, 마침 지인들과 코벤트 가든의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던 차였다. 사실 그날 오후부터 뉴스에선 여왕의 건강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이미 보도되고 있었고 BBC 기자들과 앵커들은 이미 아침에 검은 수트와 넥타이를 매고 출근을 했다는 것으로 봐선 여왕의 실제적인 죽음과 보도 사이에는 꽤 긴 텀이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여왕 서거를 발표하는 BBC 뉴스. 


서거가 발표된 당시, 레스토랑엔 짧은 탄식들이 들려왔고 다같이 30초 정도 묵념을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여왕도 아니지만서도, 미디어에 계속 노출되던 사람이다 보니 일정정도 마음이 뒤숭숭해 오는 건 나도 매한가지였다. 영영 안 죽을 것 같던 할매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시간이 나도 모르는 새 열심히 흘러갔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했다. 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지금까지 왕좌에 있었으니 세계인들에겐 근현대사가 사라진 기분이 들게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묵념하는 사람들. 


레스토랑에서 버킹엄이 멀지도 않고 해서 식사 후 지인들과 그곳으로 향했다. 도착할 무렵부터 조금씩 내리던 빗방울이 차차 굵어지는 것처럼 버킹엄에도 사람들이 조금씩 몰려들고 있었다. 


어떤 이는 매우 비통하게, 어떤 이는 호기심 어리게, 어떤 이는 마치 엔터테인먼트 이벤트에 온 것처럼 현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것이 영국인들이 왕실을 생각하는 그 복잡미묘한 감정일 것이라 짐작해본다. 

빗방울도 굵어지고 사람들도 많아지고. 


왕실은 브렉시트로 완전 맛탱이가 가버린 영국이 한 때 세계를 호령하고 문화를 선도한 제국이었음을 상징하는 제도이면서도, 한편으론 세금을 좀 먹는 시대착오적인 제도. 여왕은 누군가에겐 권위와 인품을 동시에 지녔던 존경받을 만한 대모이면서도, 또 누군가에겐 온갖 악행을 저지른 영국 제국주의를 표상하는 악녀였을 테다. 그날의 버킹엄은 그러한 감정들이 범벅된 장소였지 않았나,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누군가는 호기심을, 누군가는 애도를. 


적어도 엘리자베스 2세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더 많이 기억되는 사람이었고, 영국인들이 그녀의 죽음이 안타까워 하는 이유는 이제 더 이상 그들이 그러한 왕을 옹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찰스왕은 그러한 우려에 부응이라도 하듯 계승 초기부터 온갖 잡음을 만들어 내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왕이라는 건 넌센스 같은 존재지만, 그래도 고귀함으로서의 표상이 필요하다면 그 정점에 선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하고, 그 사람을 떠받히는 시스템은 어떤 식으로 발전되어야 할까? 


넌센스 같은 시스템을 두고 정답을 찾는다는 것도 씁쓸한 일이지만, 그 정답에 가까웠던 사람 하나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도 다소 씁쓸한 일이다. 

피카델리 서커스 전광판. 


God bless the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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