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은 베란다 확장 공사를 통해 조금 넓어졌다. 그리고 넓어진 대가로 차가운 외풍을 맞고 있다. 종종 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피아노를 치고 싶은 마음에 피아노를 창문가에 놓아둔 게 화근이었다. 피아노는 몇 번 뚱땅거리지도 못한 채 나의 간이 책상으로 전락해버렸고, 어쩌다 보니 외풍이 제일 심한 문 앞에 앉아 글을 쓰는 날이 이어졌다. 창문을 열지 않았지만 쏠쏠히 불어오는 바람 덕에 바깥으로 내놓은 발은 온전히 그 바람을 느끼고 만다. 처음에는 바람을 막아보고 싶어 별 짓을 다했다. 바닥에 작은 러그를 한 겹 깔아보기도 하고, 외풍을 차단해준다는 문틈 차단막도 사서 붙여본 적이 있다. 수면양말 서 너 개는 항상 책상 주위에 놓여 있곤 했다. 그러나 외풍은 계속해서 불어왔다. 바람은 하루도 빠짐없이 내 발을 간질였는데, 올 겨울엔 이마저 따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창틀의 마감이 엉망이어서 바람이 더 쉬이 들어오는 구조인 듯싶었다. 엄마는 바람과 싸우고 있는 나를 보더니 한마디 거드셨다. '차라리 피아노 위치를 옮겨보는 건 어때.'
나는 고집을 부렸다. 피아노도 그 자리에 있고, 나도 그 자리에서 글을 쓸 건데 바람만 안 불게 하는 방법은 정녕 없는 거야? 누가 보면 별 것 아닌 일에 고집을 부린다며 혀를 끌끌 찼을게다. 아마 엄마도 딸내미가 아니었다면야 혀가 닳도록 끌끌 차댔으리라. 이런 효율성이라고는 0에 수렴하는 사람 같으니. 사실 환경을 바꾸는 건 불편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가장 효과적이고도 빠른 방법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절이 싫어 떠나버리는 중이 되지 않는가. 그러나 이 효과적인 방법은 등진 채 차라리 절에 비닐하우스를 치고 살겠다면서 끙끙거리는 나를 보면 안타까울 법도 하다.
고집불통 외골수인 나는 오늘 아침에도 외풍이 부는 창가로 향했다. 그러면서 생각에 잠겼다. 왜 나는 외풍이 들이치는 이 공간을 포기하지 못하는지 궁금해졌다. 가만히 마음을 들여다보자 내 안의 소리가 외치고 있었다.
나는 절이 싫다고 떠나는 결말을 만들고 싶지 않아. 부분 때문에 전체를 포기하긴 더더욱 싫고.
그렇다. 나는 생각보다 더 많이 창문 가까이에 놓인 그 공간을 사랑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면 새들끼리 나뭇가지를 오가며 짖어대는 소리가 들리는 공간, 어둠을 헤치고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기에 최적인 공간, 테이블이라기엔 엉성하고 비스듬한 불안정함이 내주는 오묘한 희열감, 저녁이면 따스한 차 한잔을 가지고 후후 불며 즐기기 좋은 그곳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불편한 상황을 떠나지 않고 기꺼이 껴안는 자세는 한 개인의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가끔 타인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찾아가 묻고 싶은 오지랖을 잔뜩 부리고 싶은 날이 온다.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그랬다. 편한 공간은 제쳐두고 의자보다 낮은 책상에 노트북을 내려놓고는 허리를 한껏 굽혀 노트북에 열중해 있는 사람, 초록불이 깜빡거리는 신호등을 건너면서도 얼굴은 휴대폰에 콕 내리꽂은 채 여유 만만히 걸어가는 행인, 흔들거리는 버스에 짐을 가득 들었는데도 절대 자리에 앉지 않는 이들이 있다. 나는 왜 그러느냐고 묻는 대신 이해했다.
내가 외풍이 드는 공간을 놓지 못하듯, 그들도 나름대로 애정이 담긴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