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쓰다.
무슨 일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우리 집에서는 참기름을 솔솔 뿌린 고소한 밥 냄새가 난다.
"엄마 어디 가?"
"응, 삼촌 허리 다쳤잖아. 김밥 좀 싸다 주려고."
어릴 적 소풍을 갈 때도, 이별의 고통에 몸부림칠 때도 엄마는 김밥을 쌌다. 주말이면 '우리 김밥 먹을까?' 하며 들들 볶아낸 당근과 계란지단 냄새가 온 집안을 가득 메우곤 했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김밥과 친해졌고, 또 무척 좋아했다. 내 일생의 크고 작은 사건에는 늘 엄마표 김밥이 함께 했기에 능청을 조금 보태자면 김밥은 곧 내 인생의 증표였다.
엄마의 김밥은 종류가 다양했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김밥은 아침에 싸 먹는 3초 김밥이었다. 당시 중, 고등학생이던 나와 동생은 아침마다 늘 침대의 유혹에 빠지곤 했다. ‘5분만 더’를 외치다가 헐레벌떡 등교 준비를 할 때면 아침은 포기하는 날이 다반사. 그럴 때마다 엄마는 3초 김밥을 만들어주셨다. 조미김에 밥을 한 숟갈 가득 담고 몽글몽글한 스크램블 에그, 김치찌개 속 묵은지를 작게 찢어 올려 3초 만에 김밥을 만들었다. 머리를 말리면서 김밥 한 개, 옷 입으면서 김밥 한 개, 로션을 바르면서 김밥 한 개씩 입에 쏙쏙 넣어주면 우리는 새끼 제비처럼 입을 쩍쩍 벌리고 김밥을 받아먹었다.
3초 김밥은 예쁜 모양은 아니지만 어떤 김밥보다도 최고의 맛을 냈다. 푹 익은 묵은지를 지글지글 끓여 내면 그 깊은 맛이 한층 더해진다. 찌개에서 꺼낸 김치는 한숨 죽어 축 늘어졌지만 매콤 칼칼한 찌개 맛을 가득 머금은 듬직한 녀석이다. 포슬포슬하게 익힌 스크램블 에그는 케첩과 버무리면 달콤하면서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거기에 화룡점정, 뜨끈하고 고슬고슬한 쌀밥 한 숟가락이면 김밥 완성! 김밥 한 개에 우리는 아침을 버텼고, 활기를 찾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김밥을 싸는 엄마를 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엄마, 엄마는 왜 김밥을 싸?"
"그야 우리 딸 먹으라고 싸지."
"아니 그게 아니라~ 무슨 일 있을 때마다 김밥 싸는 거 같아서 그렇지."
"그러니까~ 우리 딸 먹으라고. 무슨 일 있어도 밥 거르지 말라고 싸는 거야."
엄마는 김밥에 노란 단무지를 넣으며 말씀하셨다.
“한 상 차리기는 힘들어도 한 개씩 집어먹는 건 쉽잖아. 김밥이야 거창하게 차리지 않아도 식탁에 두면 오며 가며 집어먹을 수 있고. 이것저것 들어간 것도 많아서 건강하고? 원래 힘들 때는 밥을 잘 먹어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쉽니. 목구멍에서 턱 막혀서 안 넘어가잖아."
"그건 그렇지. 힘들 땐 밥 생각이 진짜 안나더라고. 차릴 엄두도 안 나고."
"거 봐. 그런데 김밥은 쏙쏙 집어먹으면 되니까 얼마나 편해. 재밌는 건 한 입에 쏙 들어가지만 꿀떡 삼킬 순 없다는 거야. 결국 씹어야 해. 턱을 놀려서 씹다 보면 밥알들이 이리저리 뭉개지면서 단맛이 고이고 그렇게 마음에도 단물이 들어."
가족들의 마음에 단물이 필요한 날, 엄마는 김밥을 쌌다.
그리고 작년엔 김밥을 참 많이도 쌌다.
엄마는 오래 다녔던 회사에 인사이동이 일어나면서 하필 작업방식이 너무 다른 상사를 모시게 됐다. 건강신호에도 빨간불이 들어왔다. 십오 년이 넘도록 함께 의지했던 상사는 투병으로 세상을 떠난 데다, 엄마 역시 세월에 쓸려 어깨며 손이며 성한 곳 없이 잔병치레가 잦았다. 나는 칠 년간 만났던 사람과 이별을 했다. 영원할 줄 알았던 관계는 허무하게 끝을 맺었고, 거기서 오는 상실감은 온전히 내가 견뎌야 할 몫으로 남았다.
우리는 그래서 김밥을 먹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두어 개씩 김밥을 집어먹었다.
"엄마, 이번 김밥 참 잘됐다."
"그치. 간도 딱 맞고 모양도 예쁘네."
우리는 이따금 김밥 얘기를 하다가 TV를 봤고, 힘든 이야기를 툭 터놓기도, 재밌던 상황을 두고 깔깔거리기도, 어제 먹은 점심 메뉴를 노닥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김밥은 대화의 물꼬를 텄다. 입 속에서 달짝지근한 밥알들이 구를 때마다 딱딱하게 굳었던 마음은 단물에 녹았고, 뾰족하게 돋아난 가시는 힘을 잃었다. 힘들 때는 입을 꾹 닫고 방문을 걸어 잠그는 게 내 버릇이었는데, 엄마의 김밥 한 줄이 자꾸 입을 열게 했다. 방문을 열고 자꾸만 나를 밖으로 꺼내놓았다.
이제야 보이는 엄마의 단물이 담긴 김밥.
마음에 단물이 드는 건 단순히 김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안 건 그때쯤이었다.
며칠 전 해넘이를 보며 불현듯 우울함이 밀려왔다. 태양은 하늘을 가로질러 바삐 움직였는데, 나는 오늘 도대체 뭘 했지 싶은 좌절감과 패배감이 엄습했다. 분명 열심히는 살았는데 가시적인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과연 나는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텁텁하고도 퀴퀴한 생각에 잠식당한 날이었다. 기분을 떨쳐야만 했기에 저녁 운동을 마치고 일말의 고민 없이 동네 작은 김밥집에 불쑥 들어섰다. 참치김밥 한 줄이 턱 내 앞에 놓였다. 입에 김밥을 넣었다. 몇 차례 씹었다. 밥알이 까끌거렸다. 마요네즈와 버무려진 참치는 고소했지만 꽤나 퍽퍽했다. 나는 내 마음이 담긴 김밥 한 개를 씹고 또 씹었다. 우리 딸, 밥 거르지 말라고 싸는 거라던 엄마의 김밥을 생각하며 나는 단물이 배어 나올 때까지 이를 부닥쳤다. 씹을수록 엄마의 단물은 서서히 내게 닿았다. 그렇게 나는 하루를 위로하는 단물을 몇 번이고 삼켰다.
가만 보면 우리들 마음속에 다들 하나씩 단물이 되는 음식이 있다. 나에겐 김밥이 마음의 단물이지만 당신에게는 구수한 청국장이, 또는 달콤한 크림빵이 단물일 수도 있다. 녹록지 않은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삐걱거리는 마음을 방치할 때가 종종 있다. 마음이 고장 났을 때는 더 망가지지 않게 얼른 단물을 삼켜야 한다. 어떤 음식이어도 좋다. 당신의 마음에 단물이 가득 차는 그 무언가를 꼭 알아두기를. 그래서 당신의 마음이 쪼글쪼글 말라버릴 때면 단물을 채우는 걸 꼭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처방전 01>
- 품목 : 엄마표 김밥 한 줄. 정 안되면 그냥 김밥도 가능.
- 사유 : 힘들어서 메마른 마음에 단물 보충이 필요.
- 용법 : 아무 생각 않고 맛있게 김밥을 드세요.
이건 나의 처방이다. 그리고 궁금해진다. 당신의 처방은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