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저녁: 첫 번째 글
나에게 쓰기란 화장실에 들어가는 일이다. 무척 내밀한 글만 써왔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 글의 형태 역시 어디에 꺼내놓기에 민망할 정도로 막돼먹은 것이기 때문이다. 주로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대면해서 말하는 데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 한 몫 했음이 분명하다. 속이 답답하거나 화가 날 때, 눈물이 나거나 억울할 때면 차마 꺼내놓지 못했던 속마음을 종이에다, 빈 화면에다 주구장창 풀어내기 바빴다. 그래서 만들어진 소위 껄쩍찌근한 글들은 누구에게도 내보일 수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내게 글은 은밀하게 행해지는 배설행위였다. 나의 쓰기 목적은 단순한 감정적 해소였으므로, 하루에 세 번 이상 쓰는 날도 있었고, 몇 달 동안 쓰지 않은 날도 있었다. 내가 처음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때는 언제였을까.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시절을 되감아 본다. 초등학교에서 억지로 시키던 일기 쓰기 말고, 대학생 때 제출하던 레포트 과제 말고, 내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쓰기 시작한 시절은 대략 스물 아홉 쯤이었다. 아무래도 그 사건 때문이었다. 서른을 넘기기 직전, 좋아하던 친구와 멀어진 나는 어디에도 토해낼 수 없는 갑갑함에 시달렸다. 주변에선 다양한 방법을 알려줬다. 술을 마시고 털어버리라거나, 주변 가까운 사람들과 얘기하면 나아질 거라고 했다. 기억은 한사코 흐릿해지고 마니까 조금 기다리면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는 조언도 뒤따랐다. 각자 겪었던 최선의 방식을 나눠주려는 마음과는 별개로 나는 그 모든 것들에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깜깜해진 달밤에 밖에 나가 뛰거나, 새벽같이 명상을 해도, 좋아하던 노래를 듣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봤지만, 순간뿐이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친구의 빈자리는 도무지 지워질 낌새가 보이질 않았다. 그때 처음 펜을 들었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 터를 잡고 꾸깃꾸깃 들어찬 갑갑함을 어딘가 옮겨 담아야 했다. 그러면 더는 마음을 침범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이중생활을 시작했다. 바깥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 굴다가 집에 돌아오면 글로 옮겨적기 시작했다. 마음을 언어화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세상살이는 대체로 어려운 일들 투성이니까. 그렇게 나는 쓰기와 만났다. 그래서 내게 쓰기는 뱉어내기와 다름없다. 완벽하게 안전하고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는 공간에서 나는 마음껏 배설을 한다. 마음을 털어내고 쓸어내고 토해낸다. 소화된 것들은 아래로, 그렇지 못한 것들은 위로 솟구쳤고 그 모든 것들을 품어준 건 언제나 글이었다. 화장실이 아무리 요란해도 아무도 알지 못했고 나는 그래서 더 마음 편히 내 모든 것들을 풀어헤칠 수 있었다. 요즘엔 쓰는 날이 줄었다. 이제야 마음이 좀 잠잠해진 모양이다.
앞서 말했듯, 감정적 해소와 쾌감을 위해 쓰였던 글이 많았던지라 지금 줄어든 글쓰기 습관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나의 오랜 벗이었던 쓰는 행위가 이젠 내 삶에서 슬쩍 비켜선 느낌이 들었다. 갑갑하다며 먼저 찾을 땐 언제고, 상태가 조금 괜찮아졌다고 소홀히 구는 게 하여튼 꼴사납다. 난, 사나운 꼴이기보다는 괜찮은 꼴이고 싶은데.(이런 생각은 도대체 왜!?) 그래서 이번 글쓰기 시간이 기대된다. 지금 이런 상태라면 축축한 글이 아니라 새털 같은 글들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한 주에 한 번씩 슬픔보다 기쁨을, 회한보단 환희를, 눈물보다 반짝이는 세상살이를 조금 적어낼 수도 있겠다. 쓰기로 파생됐던 과거의 슬픔이 나를 구원했듯, 오늘치 웃음이 나를 위로할지도 모를 일이니까. 이렇게 마음먹어도 어떤 글이 나올지는 장담할 수 없다. 매주 아리송하고 두려울 것 같다. 글은 화장실에 다녀온 후에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저 매주 어떤 모습이든지 즐겨주는 것, 그리고 혹시나 내 글이 누군가를 상처입히지 않도록 다듬어 주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