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저녁: 네 번째 글
나는 눈물이 많다. 때와 시를 가리지 않고 자주 우는 편이다. 어려서는 산타할아버지한테 선물 못 받는다는 으름장으로 여러 차례 협박을 받았다. 하지만 그 소리에 더 섧게 우는 게 나였다. 크면서도 눈물은 줄어들 줄 몰랐는데 그럴수록 자칫 눈물로 호소하거나, 말은 똑바로 못하면서 울 줄밖에 모르는 울보로 취급받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우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니 고쳐야 한다는 쓴소리도 걸핏하면 들었다. 잘 우는 사람은 감정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하고, 딱 부러지지 못해 보인다는 말과 생각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안 준대도 꿋꿋하게 울던 아이는 점점 울지 않는 것이야말로 어른의 자질이라고 생각했고, 눈물 많은 스스로를 탓하기에 이르렀다. 눈물을 어떻게 멈추게 할 것인가는 나의 최대 논제였다. 화가 나도 기쁜 날에도, 떨릴 때도 눈물부터 왈칵 쏟아지는 나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과제였다. 제멋대로 흐르는 눈물을 통제할 수 없어서 자주 무력해졌다. 손등을 꼬집거나 입술을 깨물기, 눈알을 팽글팽글 돌려서 눈물을 마르게 하는 식의 여러 방법을 써봤지만 잘 먹히지 않았다. 수년간 고치려고 애를 쓰자 해결책이 보이기 시작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반응하기, 더 큰 웃음으로 무마해버리기 등의 방식이 나에게 잘 먹혔다. 나의 눈물은 대체로 깊은 감응과 상상에서 비롯한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희노애락을 가리지 않고 그 순간을 상상하거나 온몸으로 느껴버릴 때면 어김없이 눈물이 흘렀던 터라 생각을 덜 하고, 조금 더 무덤덤하게 세상을 보면 눈물이 날 일에도 덜컥 울지 않을 수 있었다.
울 일이 사라지고 눈물이 마르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이제야 내가 눈물을 참아낼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잔소리하기를 멈췄다. 세상이 고요해졌다. 이제 됐다. 나도 드디어 어른이 됐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며칠 전 지하철을 탔다. 퇴근길 승객으로 만원이었다. 꽉꽉 들어찬 사람들을 피해 문가 쪽에 서 있었는데 눈앞에 쓰여있던 한 문장이 뇌리에 박혔다. “어디에도 길은 있습니다!” 회생, 파산 신청을 하는 도산전문변호사의 지하철 광고지에 쓰인 문장이었다. 희망을 말하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거나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같은 말들처럼. 그런데 희망을 외치는 문장 앞에서 나는 더없이 우울해지고 말았다. 모든 문제는 해결 가능하므로 반드시 극복해야만 한다는 목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삶 속에서 다가오는 여러 문제와 고난은 수정되어야 하고 극복되어야 했다. 그러면 사는 건 더 나아질 거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위로와 낙관, 희망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인간을 한 편의 극복 서사에 부드럽게 굴종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크고 작은 문제들은 ‘문제’로 명시된 뒤로부터 ‘해결’을 종용받았고, 극복하지 못하면 문제아로 남는다. 상처는 아물어야 하고, 동화는 해피엔딩, 어려움은 우리를 성장시키는 도구로 여기게 한다. 여기선 무조건 해결과 극복을 선택하게끔 판이 짜인다. 그러므로 ‘현 상태’에서는 좋은 것이 없다. 수정되지 않은 나는 고쳐져야 할 사람이 된다. 해결책이 있는데 ‘왜 고치지 않느냐’며 개인을 타박하기에 이르고, ‘보편적’이거나 ‘정상적’으로 보이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마치 수정되기 전의 나는 완전히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눈물샘이 많은 나는 옳지 못한 인간. 더 나아져야 하는 인간. 그래서 지금은 온전하지 못한 인간인 셈이었다.
더 나아지는 삶만이 가치 있는 삶이라면, 우리는 영원히 버둥거려야 한다. 나아지는 데 한계는 없다고들 하니까. 더 많은 부, 더 많은 행복, 더 많은 성장……. 어제의 나와 싸워야만 하는 오늘의 나. 어제의 나를 부정해야 등장할 수 있는 오늘의 더 나은 나. 나는 이런 것들에 질려버린 참이다. 세상은 보기 좋게 말한다. 성장은 나선형이니까 좌절하지 말라고, 지금도 나아지는 중이라고, 나아가는 중이라고 위로를 한다. 그게 정말 위로인지 멈추지 못하게 하는 채찍질인지 더는 분간되지 않는다.
우리는 고장나고 부서지고 상처 입은 채로 그 흉터를 지니고 살면 안 되는 걸까. 지긋지긋하고 고통스러움을 꾸역꾸역 느끼면서도 이를 수정하지 않고, 지옥 속에 살기를 택하더라도 고칠 필요 없다는 말이 나를 오히려 나에겐 위로가 된다. 그저 눈물 날 때 눈물을 쏟고, 조금쯤 우울해도 괜찮은 나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