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는 용감했데요.

험담

by 서량 김종빈

어릴 적에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봤었다. 이런저런 일을 겪고 친구가 된 두 사람이 헤어질 때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 “언제, 어디서라도 자네의 명예를 욕보이는 이가 있다면 내가 자네의 명예를 반드시 지켜내겠네.” 사실, 오래전이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아무튼,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응? 어?’ 하고 말았다. 뭔가 과한 느낌이 들어서 말이다. 당시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시절보다 나이를 좀 더 먹고 나니, 알겠더라. 과하다 싶었던 그 말이 전혀 과하지 않았다는 것도, 세상을 살다 보면 꽤나 절실한 이야기라는 것도 모두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내 험담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정도의 사실에 오해를 덧붙이고, 각자의 취향대로 포장한 풍문, 이야기 곳곳에 강하고 진한 색까지 발라놓아서 눈길을 끌 수밖에 없는 이야기. 내가 들어도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돌고 돌아 내 귀에 들어오는 내 험담을 생각보다 즐기는 편이다. 사실에서 얼마나 각색이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고, 험담이 어떤 사람들을 통해 전해졌는지 유추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리고 가장 재미있는 건 내 험담을 왜 하는지 나름 생각해보는 것이 가장 재미있다. ‘대체 무슨 연유와 동기로 나를 험담하는 걸까?’ 하고 생각해보는 거다.


내가 이렇게까지 내 험담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내 오만함과 열등감 덕분일지도 모른다. 성격이 몹시도 고약한 나는 내가 인정한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험담이 아니고서야 별 감흥이 없다. 나보다 괜찮은 사람이라서, 나보다 멋진 사람이라서, 내게 열등감을 가득 안겨주는 사람의 험담이 아니고서야 화낼 기운조차 생기지 않는다.


이를 테면, 나보다 매력이 없는 사람에게 “너는 매력이 없어.” 같은 소리를 듣는다거나, 아무리 봐도 내 인품보다 더 떨어지는 사람이 내 인품을 문제 삼는 들 내 입에서는 “아, 예, 그렇군요.”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거다. 내가 둔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함부로 내 위와 아래는 나누는 내 오만함 덕분에 나는 내 험담을 즐기고 있는 거지.


물론, 내게 열등감을 주는 멋진 친구들이 나에 대해 험담한다면, 나는 몇 날 며칠을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남들 배로 괴로워하기도 해서 이런 성격도 마냥 좋지만은 않다.


아무튼 얼마 전에 누군가가 내 험담을 하고 다닌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다행이라는 생각도 좀 들었다.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친구의 입에서 나온 험담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 그 험담이 유약하고 모자란 친구에게서 나온 것이라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근데 이 이야기를 내게 전하던 친구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내 험담을 듣고 대신 화를 내준 것이다.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벗이, 내 형제가 세상 어디선가 나도 모르는 중에 떠도는 험담에 이토록 화를 내주는구나 싶어서 마음이 든든했다.


내게는 명예라고 할 것도 없다지만, 가치 없는 험담에 화를 내며 내 오명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쁘던지 말이다. 더불어 괜히 어깨가 으쓱한 것이 “내가 아직 사람 보는 눈이 어디 가지는 않았구나.” 싶었다.


나는 여전히 많은 잘못을 하고, 후회도 하고, 욕도 먹고 한다. 잘못한 만큼 대가를 치루기도 하고, 그보다 더한 대가를 치루기도 한다. 때때로는 편견과 오해에 휘둘리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로 성가신 일에도 휘말린다. 하지만 내 명예를 지키기 위해 화를 내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끔은 내 험담이 세상에 나도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하다.


다시 한번 내 형제들의 수고에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 도깨비 같은 이 나를 형제로 둔 당신들의 업이려니 하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추신, 약속하지요. 나 역시, 내 형제가 어디서 되도 않는 놈들에게 욕을 먹고 있다면 가만히 보고 있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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