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by 서량 김종빈

"하나, 둘, 셋. ...넷, 다섯."

침대에 누워 라디오를 듣는다. 전파를 타고 이 좁은 방구석까지 흘러 들어온 노래, 수를 세아린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모두 숫자로만 남은 것 같아." 노래는 끝없이 수를 세아린다.


눈을 감은 채로 함께 수를 세아려본다. 노랫말처럼 혹시 될까 싶었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그녀가 내게 걸어올 때 몇 걸음이었는지, 사랑한다 말한 적이 몇 번이었는지, 헤어짐을 말할 때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는지, 그런 것들이 세아려지지 않는다.

숫자로조차 남지 못하는 우리의 시간이 조금 서럽다. '셈이 약해서 그래, 평소에도 샘이 약해서, 그래서 그런 거야.' 더 서러워지기 전에 변명을 중얼거린다.

라디오는 그런 내가 아무래도 상관없었나 보다. 노래는 숫자를 세아린다. 세아림이 다 끝나기까지 그녀를 생각해봤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녀가 내게 걸어올 때면, 한 열 걸음 정도를 앞에 두고는 멈췄었다. 그러면 내가 마중을 나갔었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그녀는 잠깐 뒤를 돌아보고는 딴청을 피웠다. 그리고는 다시 나를 보고 헤실거리며 웃었지.

그리고 우리가 헤어질 때 그때 그녀는 눈도 못 마주치고 컵 접시의 가장자리를 만지작 거렸어.

노래가 숫자를 세아린다. 오랜만이다. 그녀가 이렇게나 선명히 떠오르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내 어수룩한 병은 진행이 되는 건지 아닌지, 나는 이제 죽는 건지 아닌지, 어떨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숫자와 함께 선명해지는 그녀를 생각하면 별로 억울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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