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욱이네 집 근처 편의점에 도착하니, 이미 녀석이 간이 테이블에 앉아있다. 그리고 앞에는 맥주와 오징어. 한욱이가 나를 보자마자 호들갑을 떨어댄다. "야, 빨리 와서 앉아봐, 너 내가 전에 말하던 우리 회사 김부장님 기억하지? 그 양반 요즘 뭐가 좀 이상했거든, 아니 평소에도 이상하기는 했는데 최근 들어서는 좀 심하게 이상했단 말이야."
한욱이가 말하는 김부장은 본 적은 없지만 이래저래 자주 들었었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굉장한 애처가라고, 근데 모든 게 자기 아내 중심이라서 가끔 보면 사회성이 결여되어있는 인간 같다고 말이다. 그때마다 나는 "이야, 그런 사람도 있구나. 아내랑 저녁같이 먹는다고 회식을 피하는 회사원이라니, 그런데도 부장까지 되다니 굉장하네." 라며 감탄했었다.
그랬던 김부장인데, 오늘 한욱이의 이야기는 좀 굉장했다. "야, 그 김부장 아내가 오늘 회사로 찾아왔다. 그리고는 같은 부서 이과장 어디 있냐고 찾더라. 근데 또 마침 이과장은 자리에 없고 말이야." 나는 의아해서 물었다. "이과장은 또 누군데?" 한욱이는 어이없다는 웃으면 대답했다. "우리 부서 여자 과장인데, 김부장 애인." 나는 "어라?" 싶어서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애처가 김부장의 애인이 이과장인거야?" 한욱이는 내게 "웃기지?" 하고 되물었다.
"야, 김부장 아내가 이과장 없다는 소리를 듣고서, 잠시 숨을 고르는 것 같더니 갑자기 지옥이 펼쳐지더라.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한욱이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더 대단한 건 뭔지 알아? 그 애처가 김부장이 이과장 그년 어디 있냐고 소리 지르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더라."
"다 줄게, 집도 주고 위자료도 주고 다 줄테니까 좀 헤어져주라. 사랑인 줄 알았는데 너는 사랑이 아니었어. 이제 나 좀 놔주라."
"와, 씨발! 오, 사람들 다 있는데서?"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욕을 하며 물었다. "어, 대박이지? 진짜 차분하고 차갑게, 목소리 흔들림 하나 없이 완전 또박또박. 그러니까 바로 전까지 소리 지르던 아내가 아무 말도 못 하더라." 한욱이는 자기도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방금 전에 와이프에게도 하고 나왔거든, 그러니까 와이프가 나한테 다행이라고 하더라.", "제수씨가? 왜 다행이래?", "나는 애처가가 아니라서, 우리는 사랑이 아니라 의리로 사는 거라서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 다행이라더라."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제수씨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너네는 그럴 일은 없겠다."
한욱이는 한참 수다를 떨어대고는 목이 말랐는지, 캔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종빈아, 사랑이 전부인 줄 알던 시절도 있었잖아. 근데 확실히 사랑이 전부는 아닌가 보다. 그치?"
푸쉭! 나는 콜라캔을 따면서 말했다. "야, 종헌이가 얼마 전에 와서 나한테 사과하더라. 근데 사과하면서도 사랑이 뭐냐고 묻더라.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이런 거랑 비슷한 것 같다." 한욱이는 뭔 소리냐는 듯 눈썹을 들썩거렸다. "콜라캔 따면 탄산거품 막 올라오잖아. 그게 사랑인 것 같다고, 없으면 콜라가 아닌데, 그렇다고 탄산만 마시려고 콜라를 먹는 건 아니잖아."
한욱이가 대답했다. "맞네, 삶은 그런 게 아니지." 그리고는 맥주 한 캔을 더 따면서 말했다. "야, 나는 니가 헤어진 연인들 만나면서 한 번은 뺨을 맞던지, 물세례를 당하던지 할 줄 알았다. 근데 여태껏 무사한 이유가 있었네. 그 상사병인가 뭔가 죽을병만 아니면 아파볼 만하네."
"그 김부장이라는 아저씨, 부럽네. 평생 가도 나처럼 그지같은 상사병은 안 걸릴 거 아니야. 멋있네. 씨발, 넌 사랑이 아니었어. 캬." 나는 테이블에 놓인 한욱이 맥주캔에 가볍게 건배를 하고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탄산이 다 날아가버리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