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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량 김종빈

“오랜만이네요.” 카페 안은 시끄럽기만 한데, 유독 우리 테이블만 정적이 흐른다. 간신히 인사를 꺼냈지만 그 마저도 정적에 무게에 눌려서 금세 바스러진다. 그녀가 그 바스러진 것들을 툭툭 털고 나서 내게 말한다. “오빠, 많이 변했네.” 13년 만이다. 변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어, 나도 이제 아저씨죠, 뭐.” 내 어정쩡한 대답에 다시 또 우리 자리만 황량해진다. 사막과 같은 탁자, 놓인 컵마저 스르륵 탁자 속으로 가라앉는 것만 같다.

“그래서 오빠는 날 왜 보자고 한 거야? 그것도 13년? 아니 14년인가? 아무튼 그 세월이 지나서 말이야.” 그녀답다. 무거운 정적도 사막 같은 탁자도 아랑곳 않는다. 그녀는 언제나 그녀가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렇다면 나도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지.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이 말하지 못하고 끝나버린 게 너무 미안했어.” 말을 하고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눈은 커피잔을 보고 있고, 코를 살짝 실룩거렸다. 입은, 입은 조금 오물오물. 기억이 난다. 그녀가 저렇게 입을 오물거릴 때는 뭔가 할 말을 여러 번 곱씹고 있었다.

“오빠, 정말 많이 변했네. 그거 알아? 예전에 그러니까 아주 예전에 우리가 만날 때, 오빠, 참 답답한 사람이었던 거.” 그녀는 커피잔은 만지작거리며 계속 이어 말했다. “나는 오빠가 참는 게 보였어, 지쳐가는 것도 보였고, 그래서 그게 항상 불안했다.” 나는 몰랐다. ‘그때 우리는 어리고, 서툴고, 그래서 잘 몰랐으니까.’라는 말로 변명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런 변명을 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미안, 그게 보였구나, 다 보고 있었구나.” 십수 년 만에 겨우 만나서 또 변명이나 하고 두리뭉실한 말로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이야기를 제대로 마주하고 싶었다.

“오빠, 나도 미안해. 사실 그때는 그냥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나 때문에 오빠가 지쳐가는 거 싫었으니까. 오빠한테 ”변했어."라고 말하고 후회 많이 했다. 생각해보면 우리 너무 흔한 레퍼토리로 헤어졌다. 그렇지?” 그녀는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오빠 잘못도 있다. 어떻게 이야기를 하나도 안 하다가 그렇게 맥없이 끝내냐. 차라리 변명하고 싸우자고라도 좀 하지, 이제하는 이야기지만 참 답답했어.” 그녀가 웃는다.

“그래서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네 덕분이야. 서툴고 어설프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랑 연애하느라 참 고생 많았지. 나중에 보니 그게 그렇게 고맙더라. 정말 다 네 덕분이었어.”

참 이상한 시간, 이상한 자리. 십수 년 만에 만나서 서로에게 미안하다, 고맙다, 이런 이야기를 하며 이제야 이별하는 우리였다. 그녀가 웃으며 말한다. “이제 우리 진짜로 헤어지는 것 같다. 오빠 확실히 변하긴 변했어. 그때는 도망쳐서 제대로 이별도 못했는데, 이제는 이렇게 매듭짓자고 찾아오기까지 하고, 김종빈씨 변했네, 올~.”

그녀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내가 꽤 멋진 사람을 만났었구나 싶어서, 그게 괜히 뿌듯해서 누구에게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 한욱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오늘 뭐하냐? 밥이나 먹자.” 한욱이가 의아하다는 투로 말한다. “너, 오늘 왜 그렇게 기분이 좋냐? 오늘 세영이 만나다고 안했냐? 뭔데?” 한욱이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야기했다. “이 새끼는 진짜 용해, 벌써 네 번째 헤어진 연인들 만나고 다니는 데 뺨 한대를 안 맞고 다니냐. 무슨 회피 만렙이야? 아무튼 이따가 우리 집 근처로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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