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래서 여태껏 별 말 없다가, 이제 와서 세영이 연락처는 왜 필요하신 가요?” 누나는 여전히 장난기 섞인 말투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뭐 일부러 안 했나, 그냥 좀 맥없이 끝나서 그랬지. 그때는 모든 게 다 서툴렀으니까, 그렇게 끝나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다시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나는 궁색한 변명을 끙끙거리며 해대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왜 연락하려고 그러는데?” 누나는 장난이 아니라 정말 궁금한 투로 내게 다시 물었다. “너무 늦은 거 아는데 차 한잔 하고 싶어서 그래요. 정말 다른 뜻 없고, 차 한잔 하려고.” 나는 내가 죽느니 어쩌니 같은 세세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좋지도 않은 이야기를 굳이 해서 좋을 게 없지 않나. “너, 무슨 일 있니?” 누나는 대뜸 내게 물었다. ‘아, 이래서 애엄마들 눈치는 무섭다니까.’ 나는 속이 뜨끔했지만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왜 정색하고 그래요. 무섭게시리.”
누나는 그런 게 아니라며 나를 따라 웃었다. “아니, 사람이 죽을 때 되면 안 하던 짓을 한다는데 네가 그런가 해서 그렇지, 뭐. 알았어, 연락처 보내줄게. 내가 알려줬다고는 하지 말고.” 그리고는 내게 한마디를 더 했다. “나중에 이야기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설명해, 알았지?” 나는 더는 캐묻지 않는 누나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받은 연락처, 근데 정작 받고 보니 이걸 어쩌나 싶다. 십수 년 만에 보내는 문자라, 그것도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고, 이걸 어쩔까 싶다. 게다가 문자를 보낸다고 한들 저쪽에서 답장을 안 하면 또 별수가 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한참 하고 나니, ‘에라 모르겠다.’ 싶었다. 연락처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간다. 그치, 신호가 가겠지. “뚜루루루” 신호가 한번, 쉬었다가 또다시 한번, 그리고 세 번째 신호가 가는 중에 “누구세요?”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누구세요?” 내가 뭐라고 말할까 미처 정리도 못한 사이 그녀는 다시 누구인지 물었다. “여보세요, 저 종빈이에요. 그, 김종빈.” 참으로도 바보 같은 첫마디다. 아니, 누구인지를 물었으니 대답하는 게 맞기는 한데, 그래도 참으로 바보 같은 첫마디다.
그녀가 대답했다. “종빈? 김종빈? 아, 오빠구나.” 그녀는 내 이름을 잊지는 않았던 것 같다. 괜히 고마웠다. “김종빈이 누구신지?”라고 했으면 아마 나는 상사병으로 죽기 전에 창피해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녀는 이미 나를 한번 살린 셈이나 다름없었다.
“잘 지냈죠?” 다시 또 바보 같은 두 번째 말, 지금 이 순간 나는 아마 지구 70억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바보짓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자 그녀가 대뜸 말했다. “어, 정말 오랜만이네, 오빠도 잘 지내지? 근데 우리가 이렇게 통화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 날카로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농담조도 아닌 말투, 나는 긴장했다. “아니, 그냥 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 정말 다른 이야기 아니고, 그냥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연락했어.” 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그녀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뭔데?”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에 전화 저편에 대고 빌듯 말했다. “아니,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 30분만.” 그러자 그녀는 까짓것이라는 투로 그러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