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완전히 내려앉자 간판 불은 여전히 꺼 둔 채, 실내의 온도만 한 칸 올렸다. 병과 돌판은 수선대 중앙에 나란히, 그물은 천장 모서리에 얕게 걸려 있었다. 주인장이 벽면의 빈 칸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오늘은 벽을 채웁니다. 이름은 쓰지 않습니다. 날짜도 적지 않습니다. 한 줄만, 현재형으로.”
나는 칠판에 크게 적었다.
이유를 들고 오세요. 오늘부터는 그게 접수표입니다.
종이 아주 작게 울리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반지 이모, 운동복 학생, 정장 남자, 빵집 주인, 버스 운전사, 청소 아주머니, 유모차를 미는 엄마, 택배 기사, 기타를 메고 다니는 학생, 엘리베이터 앞에서 자주 보던 노인. 모두 손에 종이 한 장씩 쥐고 서 있었다.
“먼저, 규칙을 말씀드릴게요.” 내가 앞숨을 짧게 내쉬고 말했다. “한 줄, 현재형, 부정어는 되도록 줄이기. 설명하지 말고 고백하기. 길게 말하고 싶어지면 점 하나로 끝내기.”
주인장이 덧붙였다.
“읽을 때는 앞에서 낮게. 박수는 하지 않습니다. 대신 숨으로 듣습니다.”
벽 한가운데에 흰 종이를 붙였다. 대표 문장. 주인장이 조용히 읽었다.
“이유를 들고 오세요. 오늘부터는 그게 접수표입니다.”
이모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손등에 그려 둔 원이 희미해져 있었다.
“저부터요? 떨리네요.”
“떨림을 나누세요.” 내가 종을 아주 작게 울렸다.
이모가 한 줄을 적고 읽었다.
“나는 오늘의 나를 놓치지 않는다.”
나는 그 종이를 벽의 왼쪽 위 귀퉁이에 붙였다. 학생이 곧장 뒤를 이었다.
“저는… 짧게 할게요.”
그가 읽었다.
“나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남겨 둔다.”
정장 남자가 목을 가다듬었다.
“질문을 기다리지 말고, 먼저 방향을 말한다.”
빵집 주인이 모자를 벗고 웃었다.
“나는 처음 두 덩이의 모서리를 나눈다.”
버스 운전사가 모래시계를 만지작거리다 한 줄을 올렸다.
“나는 문턱에서 2초를 더 연다.”
청소 아주머니가 소매로 손을 닦고, 짧게 읽었다.
“나는 남의 발자국을 밝게 만든다.”
유모차 엄마가 아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이가 먼저 지나가도록 길을 만든다.”
택배 기사가 송장을 접어 주머니에 넣고 올라왔다.
“나는 초인종을 두 번 누르지 않는다.”
기타 학생이 손끝으로 현을 튕기는 흉내를 내더니 웃었다.
“나는 틀린 음을 숨기지 않는다.”
노인이 지팡이를 벽에 기대고 천천히 종이를 펼쳤다.
“나는 자리 양보를 부탁하는 법을 배운다.”
문장들이 벽을 타고 올라가고, 서로의 옆구리를 맞대며 줄을 이뤘다. 붙일수록 방의 호흡이 넓어졌다. 주인장이 손을 들어 잠깐 멈춤을 알렸다.
“좋습니다. 지금부터는 설명을 빼고, 점 하나로 끝내 보는 연습을 합니다. 말문을 열고 닫는 시간도 이유의 일부니까요.”
나는 벽 오른편에 작은 점이 찍힌 종이를 붙였다. 점 하나가 가게의 등불처럼 보였다.
“이 방법이 어려우면,” 내가 말했다, “먼저 내 문장 앞에 ‘오늘’이라는 단어를 붙여 보세요. 내일로 밀리지 않게.”
운동복 학생이 다시 앞으로 나왔다.
“오늘, 나는 내 이름을 작게 부른다.”
정장 남자가 뒤따랐다.
“오늘, 나는 잘 보이지 않으려 애쓰지 않는다.”
반지 이모가 손등의 원을 한번 쓸며 말했다.
“오늘, 나는 손등에 원을 그린다.”
빵집 주인이 빵칼을 허리에 찔러 넣고 짧게 덧붙였다.
“오늘, 나는 탄 모서리를 먼저 꺼낸다.”
노인이 작게 웃으며 지팡이를 두드렸다.
“오늘, 나는 걸음을 반 박자 늦춘다.”
나는 벽의 빈 칸을 찾았다. 내 차례였다.
“오늘, 나는 앞에서 낮게 말하고 빨리 비켜선다.”
주인장이 내 쪽을 힐끗 보았다. 그의 손끝이 바늘 대신 펜을 잡았다.
“오늘, 나는 내 상처를 오늘로 옮긴다.”
사람들이 숨으로 박수쳤다. 어깨가 들썩이고, 눈매가 부드러워지고, 모래시계의 모래가 일정한 속도로 흘렀다. 그때 문이 반쯤 열렸다가 멈추었다. 검은 우산이 문턱에서 잠깐 서성였다. 나는 앞숨을 짧게 내쉬었다.
“들어오세요. 접수는 이유 한 줄입니다.”
그가 우산을 접고 천천히 들어왔다. 젖지 않은 손목, 오늘은 장갑이 없었다.
“…규칙이 많군요.”
“간단합니다.” 주인장이 미소를 얹었다. “이름 없음, 날짜 없음, 한 줄, 현재형.”
그는 벽을 훑어보다가 빈 칸 하나를 골랐다. 펜을 들고, 오래 서 있었다. 모두가 숨으로 듣는 사이, 그는 적었다. 그리고 읽었다.
“오늘, 나는 밖으로 팔지 않고 안에서 되돌린다.”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았지만, 방의 온도가 아주 얕게 올랐다. 그는 종이를 벽에 붙이고 한 발 물러섰다. 주인장이 종을 살짝 눌러 모서리를 고정해 주었다.
“다음은 ‘점’입니다.” 주인장이 말했다. “문장을 길게 만들지 말고, 점 하나로 끝내세요. 말의 뒤에 남는 침묵이 오늘의 접수입니다.”
유모차 엄마가 나섰다.
“오늘, 나는 아이와 눈을 맞춘다.”
점.
택배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나는 초인종과 노크 사이에서 쉰다.”
점.
청소 아주머니가 웃었다.
“오늘, 나는 물기를 한 번 더 짠다.”
점.
나는 종을 아주 작게 울렸다. 내 귀에만, 그의 귀에만. 벽의 문장들이 점들로 끝나며 숨을 가졌다. 그때 빵집 주인이 손을 들었다.
“혹시… 두 줄은 안 될까요?”
주인장이 웃었다.
“한 줄의 숨이 길어지면 두 줄이 됩니다. 해 보시죠.”
빵집 주인이 천천히 읽었다.
“나는 오늘 반죽에 물을 조금 덜 넣는다. 그래야 내일 더 오래 씹는다.”
사람들이 미소를 지었다. 주인장이 빵집 주인의 종이 옆에 작은 점 하나를 그려 주었다.
“두 줄로 보이지만, 사실은 한 줄입니다. 내일로 이어지는 현재형.”
운동복 학생이 갑자기 손을 번쩍 들었다.
“이유가 자꾸 멋있어져요. 괜찮아요?”
“괜찮지 않습니다.” 내가 웃었다. “멋은 떨림을 숨길 때 입는 코트라서요. 벗고 적어 봐요.”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솔직하게 읽었다.
“나는 오늘, 못 넣어도 욕하지 않는다.”
방 안이 조금 더 편안해졌다. 정장 남자가 이어 받았다.
“나는 오늘, 대답이 막히면 ‘잠깐만요’라고 말한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오늘, 혼자 일어서지 못하면 손을 든다.”
반지 이모가 조용히 덧붙였다.
“나는 오늘, 잃어버려도 나를 잃지 않는다.”
나는 벽의 문장들 사이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종이의 모서리가 미지근했다. 병이 아주 얇게 김을 뿜었다. 그물에 걸린 빛이 한 올, 두 올 내려와 벽을 스쳤다. 말들이 서로의 옆에서 온도를 나눴다.
잠시 휴식. 빵 모서리를 조금 떼어 나누고, 물컵을 돌렸다. 주인장이 다음 연습을 안내했다.
“이번에는 ‘왜’ 대신 ‘무엇으로’. 이유의 도구를 적습니다. 손, 숨, 발, 눈, 귀, 시간, 자리. 하나를 골라 붙이세요.”
유모차 엄마가 곧장 말했다.
“나는 눈으로 길을 만든다.”
학생이 손목끈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손으로 떨림을 나눈다.”
정장 남자가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꺼내며 읽었다.
“나는 시간으로 정중함을 만든다.”
버스 운전사가 모자를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리로 안전을 만든다.”
청소 아주머니가 대걸레를 문턱에 기대며 웃었다.
“나는 발로 반짝임을 모은다.”
그가, 검은 우산의 주인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귀로 나눔을 배운다.”
주인장이 그 문장을 벽의 중앙에 붙였다. 중심이 생겼다. 나는 그 아래에 대표 문장을 다시 한 번 또박또박 썼다.
이유를 들고 오세요. 오늘부터는 그게 접수표입니다.
밤이 깊어지자, 벽은 거의 가득 찼다. 남은 빈 칸은 몇 손가락 너비뿐. 주인장이 마지막 순서를 알렸다.
“마감 전 한 줄. ‘오늘’ 없이 적어 봅니다. 내일에도 읽히는 현재형으로.”
모두가 한 줄씩 더 적었다. 가장 짧은 숨으로. 가장 덜 멋있게. 가장 덜 무겁게.
“나는 내 자리를 만들고, 비켜선다.”
“나는 잘못 들으면 다시 묻는다.”
“나는 먼저의 무게를 덜어 준다.”
“나는 작은 실패를 남긴다.”
“나는 한 번 더 닦는다.”
“나는 못 본 척하지 않는다.”
“나는 기다림을 줄 세우지 않는다.”
“나는 느린 박자를 잃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주인장이 썼다.
“나는 오늘의 온도를 지킨다.”
그 문장이 붙는 순간, 종이 아주 맑게 울렸다.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벽의 종이들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흔들리다 멈추고, 멈추다 서로 기대었다. 나는 병에 오늘의 이유를 접어 넣었다.
오늘은 이유를 적고, 숨으로 들었다.
주인장이 돌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충분합니다. 벽이 오늘을 기억했습니다.”
사람들은 조용히 돌아갔다. 돌아서며 각자의 문장을 한 번 더 속으로 읽는 얼굴. 문을 반닫자, 우산 주인이 잠깐 남았다. 그는 자신의 문장 앞에서 서 있었다.
“나는 귀로 나눔을 배운다.”
그가 나직이 물었다.
“내일도… 올 수 있을까요.”
“이유를 들고 오세요.” 내가 웃었다. “그게 접수표니까요.”
문을 닫고 불을 낮추었다. 벽의 흰 종이들이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보였다. 종이 하나하나가 작은 등을 켜 둔 듯. 병과 돌판 사이의 온도가 밤까지 미지근을 유지했다. 주인장이 종을 아주 작게 울렸다. 내 귀에만, 그의 귀에만, 오늘 자신의 한 줄을 읽은 모든 사람의 귀에만 들리게.
나는 가게 구석에서 펜을 들어 조그만 메모를 적었다.
내일의 안내 — 이유를 한 번 더 짧게.
메모를 접어 접수병 옆에 세웠다. 벽을 다시 돌아보며, 나는 알았다. 이름 없이 붙은 문장들이 서로의 온도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내일 누가 먼저 들어오든, 접수표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이유 한 줄. 숨 한 번. 점 하나. 그리고 아주 작은 종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