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잘게 부서진 시간의 금가루들이 여기저기 쏟아져 나간다.
여름의 아지랑이를 뚫고 걷는다. 도시와 음악소리, 아름다운 사람들, 돈과 나를 흥분시키는 향기로부터 멀어진다. 디딜 틈 없던 메사나 광장과 좁다란 골목에 즐비해 있던 기념품 숍, 아시안 레스토랑의 메아리가 여전히 귓가에 울렸으나 때가 되면 다시 고요를 되찾는다. 이제 나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벌거벗은 몸으로 미로의 끝을 향한다. 코너를 돌고, 다시 펼쳐진 길의 끝을 가늠한다. 그러면서 나의 미래를 그려본다. 역시, 모르겠어. 나는 이쯤에서 길을 잃은 것이 확실하다. 아니면 나 자신을 잃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쇼윈도 너머로 상념 가득한 젊음의 얼굴만이 보인다.
밟으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릴 흰 모래색의 원피스 사이로 나의 검은색 비키니가 비친다. 수영을 마친 어제저녁 무렵, 나는 보았다. 끊어지지 않을 듯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무심히 널려 있던 검은 수영복을. 문틈으로 새어 나온 빛이 그 위를 가르던 모습을. 저녁의 공백에 갇혀버린 시간을. 그때 나의 머리카락도 물에 젖어 있었고, 그 순간 우리는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낮의 서막에 올라 열연 중인 20유로의 비키니를 보면, 금방 모든 것이 끝날 것 같다. 한낮의 태양 아래 메말라 가는 우리. 어제의 영원은 이미 묵살되었고, 나는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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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카페 창가 옆에 자리를 잡고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평범한 하얀색 인테리어는 늘 그렇듯 눈을 따갑게 했다. 건너편에는 외국인 네 명이 프랑스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한창 떠들고 있었는데 그중 아시아계 프랑스인 남자에게 눈길이 갔던 이유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 때문이었다. 곧바로 내 앞에 앉은 친구들에게 남자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몰래 따라 해 보이며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는 듯이 능청을 부렸다. 나는 우울해질 때면 자주 그랬다. 문득 연기를 배웠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그날의 주제는 슬픔이었다. 연기를 위함이었으나 이내 툭 건드렸을 뿐인데 진심으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뜻밖의 말이 돌아왔다.
"그래... 지호야. 너는 슬플 때 웃니?"
나의 진심 어린 눈물에 쉽게 말을 잇지 못하던 선생님은 내가 울면서도 웃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날 나는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어수룩해 보이는 카페 직원이 계단을 올라 우리에게로 왔다. 우리는 조용해졌다. 그의 얇은 손목과 여러 잔들이 올라간 쟁반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걸 보고서 니스에서의 문제는 그런 것들과 나의 마음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 앞으로 냅킨과 포크와 반가운 얼음이 담긴 카페라테 세잔과 레몬 파운드케이크를 아주 천천히 놓았다. 그러면서 누구의 시선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이 느긋함을 내보였다. 거기서 우리가 한 마디씩 말을 했다면 아마도 스물여섯 번의 바통이 넘겨졌을 테지만 그것은 각자의 자유에 틈입하는 것과도 같이 느껴졌고, 말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할 일을 다 한 그는 사라지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나는 직원의 까만 머리칼이 계단 아래로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거울을 통해 바라보며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모든 것을 주시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모든 것을 바라보면 그 끝에 깨달음이 있겠지. 나는 라테를 들이켰다. 밍밍한 라테의 맛이 입안 전체를 감돌았다.
그러나 또다시 나를 불안하게 하는 하얀 테이블. 어릴 적 선생님과의 기억. 감정 분간의 어려움. 그로부터 엇갈린 시간들. 그 모든 것이 내게는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켜 곧 싫증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디로? 이곳, 모든 상황, 심지어는 나 자신까지도 미치도록 싫다고 외칠 수 없는 나는 결국 불안한 내 정신에 얌전히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곧바로 커다란 얼음 하나를 입에 넣고서 이빨로 깨부수는 것으로 소심한 반항을 내보인다. 입 안 근육의 움직임이 내게는 자기 파괴의 감각으로 느껴진다. 그런 감각들까지도 기억 속에 깊이 새긴다. 그러고서는 친구들에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여전히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이곳에 한국의 커피 체인점과 같은 곳을 차린다면 어떨 것 같아?"
"적어도 여길 찾는 한국인들은 오겠지. "
"아, 난 정말이지 추워서 소름 끼치고 싶어."
"여긴 그런 곳 없을까? 얼음 동굴 같은 곳 말이야."
7월 말 33도에 육박한 프랑스 남부의 심장에서 얼음 동굴을 찾는다. 와그작. 얼음을 깨물어 씹는다. 혀끝에서 단어의 파편들이 얼음과 함께 금세 녹아 없어진다. 동시에 잘게 부서진 시간의 금가루들이 여기저기 쏟아져 나간다. 바다로. 땅으로. 우리가 앉은 테이블로. 금빛으로 뒤덮인 채 빛나는 사물들을 나는 오래도록 바라본다. 붉은 여름꽃과 유리잔. 모래알처럼 반짝거리는 그녀들, 시간의 황홀경 또한 바라본다. 그러나 그 뒤에 남은, 이전 것들과 대조를 이루어 내 마음 한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본다. '잃어버린 마음'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그 잔상을 종이에 적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