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세계 속으로
♡ 고속도로 통행증, 비넷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서 숙소 구석구석을 아이들과 함께 깨끗하게 청소하고, 너무나 예쁜 집을 제공해준 '라우리'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손거울과 자석 메모꽂이를 선물로 건네주면서 고마움과 아쉬움을 뒤로한채 다음 여행지인 스위스를 향해 출발했다.
스위스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비넷이라는 고속도로 통행증이다. 프랑스에서는 고속도로 통행료를 현금으로 지불했지만, 스위스에서는 비넷을 구입해서 차량 앞 유리에 부착해야 한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스위스 국경 근처의 주유소에서 구입하여 붙이면 된단다. ‘그냥 사서 붙이면 되는 거 아냐?’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무언가 생소한 것을 하기 위해서는 긴장과 떨림이 동반된다.
나는 이것도 좀 걱정이었다. ‘만약에 비넷을 제대로 구입 못하고 스위스 국경에 들어가다가 경찰에게 걸리면 어떡하지?’ ‘말도 잘 안 통하는데...’ 별의 별 걱정들이 눈앞을 가로막어서 였는지 지나오는 길에 주유소를 못 본거 같은데 생각보다 빨리 스위스 국경에 도착해 버렸다.
역시나 경찰관이 비넷이 있는 차량과 없는 차량을 구분하고 있었다. ‘아! 이제 어떡하지?’하며 우선 경찰관이 인도하는 대로 길 가장자리로 차를 붙여 세웠다.
그런데 내 걱정은 역시나 별 의미 없는 기우였다. 비넷이 없는 차량은 현장에서 경찰관이 비넷을 발급해 주고 있었다. ‘휴~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이 길게 쉬어지는 순간이었다.
♡ 추리소설 같은 숙소 찾아가기
국경을 지나 스위스 프랑으로 환전하기 위해 베른을 잠깐 들려 시내 구경을 하고 다시 숙소를 향해 출발했다. 숙소까지는 두 시간여를 더 달려야 했다. 베른 시내를 빠져나오니 드디어 눈덮인 산도 보이고, 넓고 맑은 호수도 보인다. 이제야 스위스에 왔다는 실감이 난다. 아무것도 없는 시골길마저 예뻐 보인다. 이럴 때는 운전도 할만하다.
숙소 도착 1시간 전부터 길이 산 쪽으로 향해 있었다. 굽이굽이 좁은 길을 한참을 올라가다 보니, 눈앞에 눈 덮인 하얀 알프스 산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보인다. 현실감이 없는 설산에 정신이 빠져 길을 오르다가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깎아지른 절벽길을 달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기도 했다.
길을 오르는 동안 중간 중간에 아기자기하고 예쁜 마을들이 있었는데도 네비게이션은 이곳이 아니라 더 멀리 가야한다며 그곳들을 다 지나쳐 버린다. ‘얼마나 올라가는 거야?’ 마치 하늘까지라도 갈 것처럼 정말 높이도 올라간다.
그 이후로도 한참을 오르고 또 올라서 겨우 숙소 앞에 도착했다. 해발 3천 미터 높이에 위치한 숙소 앞 경치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장관이었다. 하늘을 향해 솟구치듯 올라선 산들이 병풍처럼 연결된 뒤로 멀찌감치 보이는 마테호른의 모습. 공기는 상쾌함을 넘어서 코끝이 시릴 정도의 깨끗함으로 내몸을 정화시켜주는 듯하다. 등산장비를 갖추지 않고 땀도 흘리지 않은 채 자동차로 이 높이까지 올라올 수 있다는 것도 현실감이 없다. 너무나 행복하고 감사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숙소가 단독주택이 아니고 콘도처럼 되어있는데, 몇 층 몇 호실인지 키는 어디서 받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관리실도 안내소도 없다. 우리가 예약한 숙소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어서 난감했다. 호스트인 '카르멘'이 보내준 숙소안내서류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봤다. 아! 자동차로 숙소를 찾아오는 방법 아래에 살짝 숨겨져 있는 안내 문구가 있었다. 다행이다.
‘건물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돌면 스키룸 이라는 나무표지판이 나오는데 거기 옆에 우측에 보면 리프트가 있어. 그 리프트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돌면 바로 오른편에 22번방이 있는데 그 방문 옆에 보면 키박스가 있을 거야. 키박스 번호를 맞추면 키가 나오는데 그걸로 열고 들어가서 숙소내부를 확인하고 나에게 연락해 줘’
이걸 한글로 써놓고 보니 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익숙하지 않은 영어문구를 해석하면서 열쇠를 찾는 건 거의 아가사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 나오는 퍼즐을 맞춰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숙소에 들어오니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게 ‘알프스소녀 하이디’에 나오는 동화 속에 나오는 집처럼 예쁘게 꾸며져 있다. 숙소에 들어와 거실 창문을 열고 발코니에 나서니 더없이 아름다운 경치가 마음을 설래이게 한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뿐,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전기가 문제다. 스위스는 다른 나라들과 플러그 모양이 달라서 그동안 우리가 사용했던 어댑터는 하나도 맞지 않았다. 그래서 핸드폰도 노트북도 모두 충전을 할 수가 없어서 무엇보다도 어댑터를 찾는 것이 급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체르마트 부근에 이런 것들을 살 수 있을만한 대형마트가 있단다. 덕분에 오늘은 전자제품 없이 자연과 함께하는 의미 있는 저녁이 될 수 있겠다 싶다.
♡ 마테호른을 배경으로 컵라면 한 사발
체르마트에는 석화연료 차량의 진입이 금지되어있다. 그래서 체르마트 인근의 타쉬라는 곳에 주차를 한 후 열차를 타고 체르마트에 들어갈 수 있다. 체르마트에 들어서자마자 마테호른을 볼 수 있는 고르너그라트 행 표를 사서 곧바로 열차를 타고 정상으로 향했다.
고르너그라트 전망대를 향해 올라가는 길은 너무나 예뻤고 눈 덮인 산들이 웅장함을 품고 둘러서 있는 모습들도 너무도 멋있었다. 관건은 마테호른인데 얼굴을 보여 줄지 어떨지는 순전히 운이란다. 올라가는 길에 보이는 마테호른은 중간에 구름이 걸려있어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고르너그라트 역에 도착해 보니, 눈앞에 펼쳐진 멋진 광경이 나를 무겁게 덮쳐 오는 듯 했다.
너무나 멋있었다. 이런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사진 찍으며 돌아다니다 보니 마테호른을 감싸고 있던 구름이 걷히면서 그 위용을 자랑했다. 이런걸 보고 장관이라고 하나보다 싶었다.
체르마트에 도착했을 때 미리 마트에 들려서 개당 3천원 주고 사온 컵라면을 먹으며 차가운 몸을 녹이기로 하고 전망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곳 전망대 레스토랑에서는 뜨거운 물 값으로 컵라면 한 개당 8천원을 받는다. 자릿세라고 생각하고 지불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먹어본 물중에서 제일 비싼 물값을 치르고 나니 컵라면에 대한 맛이 더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듯하다. 눈 덮인 산 정상에서 먹는 컵라면은 꿀맛이라고만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정말 행복한 맛이었다.
정상 전망대에서는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댔고, 나는 아내와 함께 전망대 벤치에 앉아 스위스의 눈 덮인 산들을 보며 여유 있고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자유여행이 아니었으면 누리지 못했을 귀중한 시간들이었다.
♡ 차를 싣고 가는 기차
구글맵이 안내하는 대로 인터라켄을 향해 한 시간쯤 가다보니, 도로가 끊기고 그 곳에 기차역이 자리하고 있었다. 숙소에서 인터라켄으로 가는 길은 알프스산맥을 통과해서 가야하기 때문에 17km길이의 긴 터널을 통과해야 했고, 자동차는 기차에 싣고 가도록 되어있었다. 신기했다. 기차 이용요금이 조금 비싼 듯 했지만 신기한 경험을 한 대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호수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인터라켄은 동쪽에는 브리엔츠호수가 있고, 서쪽에는 툰호수가 있다.
오늘따라 살짝 안개가 내려앉아서 그런지 분위기가 더해져서 호수가 정말 멋있어 보였다.
우리는 경치 좋은 장소를 잡아 미리 포장해 온 샌드위치로 점심을 대신하고서 각자의 방식대로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공간을 맞이하기로 했다. 아이들은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고, 아내는 산과 호수의 냄새를 맡으며 평온함을 즐긴다고 하더니 낮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이 아까운 풍경을 그냥 눈으로만 볼 수 없어서 호수주변을 산책하며 사진으로 남겼다.
♡ 이런 게 진짜 휴식이지
내일 독일로 출발하기 전에 몸도 좀 쉬고, 마음도 좀 쉴 겸, 그리고 다음 여행계획도 점검할 겸, 겸사겸사 오늘은 하루 쉬기로 했다.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이 충분히 늦잠을 잘 수 있도록 일어날 때 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역시 안 깨우면 아무도 안 일어나는 대단한 가족이다. 아침 10시가 다 되어서야 배가 고프다며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렇게 게으른 가족들과 함께 벌써 7주를 버텨낸 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남은 5개월을 과연 잘 버텨낼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이다.
김치부침개와 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거실 앞 발코니의 티테이블에서 음악을 들으며 차 한 잔의 여유를 만끽해 보았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는 해발 3천 미터의 높은 산위에 있는 콘도여서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정말 멋있다.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과 시원한 산속에서 느껴지는 깨끗한 공기 덕분에 자연 힐링이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어제는 고산병 증상으로 약간의 두통을 호소하던 아내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다며 이 시간을 즐기고 있다.
이런 게 바로 여행의 즐거움이고 진짜 휴식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