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째도 살아갑니다-3
나는 나의 직업을 '비정규직 공무원'으로 소개한다. '국회 보좌진'이라는 여엿한 명사를 두고 굳이 저 표현을 쓰는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저보다 더 좋은 말이 없다는 것이 크다.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우습지 않게 국회는 직업안정도가 0에 수렴했다. 그러기에 나는 매일매일 긴장했다. 잘리지 않기 위해, 가능한 승진하기 위해, 승진해서 더 잘리지 않기 위해 말이다. 그렇다고 나만 잘하면 되냐? 그것도 아니다. 나 스스로에게 한점 문제가 없을지언정, 4년을 주기로 거대한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나의 고용인인 '국회의원'의 선거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나뿐만 아니라 동료, 선배, 후배 등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불안감에 몸서리친다. 그러니 '비정규직' 공무원, 이토록 적합한 단어가 있을까.
가끔은 내가 일하는 것을 보고 친구들은 '어떻게 그렇게 일할 수 있냐, 그게 맞느냐' 근본적인 의문을 내비친다. 연차가 쌓인 지금은, 출마하지 않을 거라면 불명예퇴직당하기 전에 국회 외 다른 곳으로 이직하라는 유혹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국회의 폐쇄적인 문화와 불합리한 관습에 분노하지만, 그렇다고 떠나고 싶지 않다. 왜 나는 계속 이곳에서 빌어먹고 살고 있는 것일까. 답을 찾고자 고민하다 보니, 나의 유년시절까지 되돌아갔다.
어릴 적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다. 남들 다하는 외식 몇 번 한 적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리듬이 느껴지는 이 문장이 나의 유년기부터 학창 시절의 이야기다. 말을 배우고, 리코더를 불고, 친구들과 뛰어놀았던 푸르른 그때의 기억 위에 '가난'이라는 단어가 레이어처럼 촘촘히 깔려있다. 가족끼리 둘러앉아 국수면을 넣은 싱거운 라면을 먹는, 가끔은 엄마가 쌀을 빌리려 이웃집 문을 두드리는, 교복에 나는 냄새가 낡은 나무 옷장에 밴 곰팡이와 습기 냄새라는 걸 알게 되는, 돈이 없어 불행했다고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매일이 불안했냐고 하면 양심상 고개를 끄덕이는. 참 별거 없이 뻔한 가난이다.
그런 집에서 자란 아이들이 짐짓 그렇듯, 나도 철이 빨리 들었다. 또한 똑똑했다. 어른스러움과 지혜를 가졌다기보다는 주제파악이 잘됐다. 내가 꿈꿀 수 있는 것과 꿈꾸어선 안 되는 것을 구구단보다 먼저 알았다. 바라는 것만으로 부모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어린 희망이 있다는 것도 이미 알았다. 헛된 꿈과 희망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러다 보니 사춘기도 오지 않았다(이것은 추후에 큰 결과를 가지고 온다). 그렇게 나의 미래는 조각되었다. 학원비가 들지 않고, 교통비와 주거비가 들지 않으며, 바로 돈을 벌 수 있는 직업. 그것이 어린 나의 장래희망이었다.
나의 후천적 장점이 칼 같은 주제파악이었다면, 나의 선천적 단점은 '빠른 질림'이었다. 고등학생 때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한 달을 채우는 게 버거웠다. pc방도, 고깃집도, 카페도, 길어야 세 달이지 모두 똑같았다. 모든 일이 너무도, 너무도 질렸다. 같은 일을 매번 반복해야 한다니. 오늘이 내일이고, 내일이 오늘이어도 아무 변화 없는 나날이라니.
쏟아지는 매일에 질리고 질린 나는 아주 잠깐, 사실은 조금 오래 연극배우를 꿈꾸기도 했다. 연극배우라면 매일매일이 다르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마음과 함께, 연극배우라면 내가 꿈도 꾸지 못한 직업을 갖지 않을까? 에서 나온 설렘이었다. 매일 새로운 관객 앞에 설 테니까, 거기서 나는 검사도 될 수 있고, 변호사도 될 수 있고, 의사도 될 수 있을 테니까. 그 꿈은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갈 무렵 고이 접어 눈물과 함께 베개 밑에 넣었다. 연극영화과 등록금과, 실기 수업 학원비를 제대로 찾아본 당일이었다.
자, 그러면 무얼 해야 하나, 딱히 하고 싶은 것도 바라는 것도 없는 시간이었다. 시간은 두서없이 흘러 남들이 하는 것처럼 대학에 진학했고, 나는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바로 휴학했다. 그리고 한 달은 창문에 커튼 대신 담요를 두른,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잠만 잤다. 슬슬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왜 대학을 갔나, 그것도 4년제를 가버렸나, 왜 취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과를 선택했나,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됐나, 나는 대단하지 않았나, 아, 나는 평생 똑같겠구나, 똑같이 가난하겠구나, 똑같이 곰팡이가 피고, 똑같이 습기가 차겠구나, 와, X 됐다. 우울하다. 대강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다. 사춘기가 더럽게 늦게 온 것이다.
사실 말이 그렇지, 한 달을 누워 지내면 몸에 좀이 슨다. 와중에 꾸준하지 못했던 나는 가끔 일어나 창문에 박힌 담요를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었는데, 한 날은 나무 창틀이 삭아 압정으로 고정한 담요가 뚝 떨어졌다. 얼핏 햇살이 들어왔다. 그렇다고 '뚜둥-' 삶의 희망을 찾거나, 그래! 그래도 해는 뜨는구나! 하며 퇴마 되기에는 내 사춘기가 만만치 않았다. 담요를 다시 고정하기 위해 안간힘 쓰다, 에라이- 때리치워라며 다시 누우려 했다. 그때 책장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책이 보였고, 심심하던 차라 꺼내 읽었다. 지금은 흔하지만 그때는 흔하지 않았던 차원이동 로맨스 소설이었다. 앉은자리에서 연작 3편을 다 읽으니 다음날 아침이었다. 책을 덮은 후 그리고 생각했다.
'더, 더 줘.'
캄캄한 어둠 속, 틈새로 비친 햇살로도 쫓아내지 못한 나의 사춘기 마귀를 차원이동 로맨스 소설이 퇴치한 순간이었다.
앞서 말했지만 차원이동 로맨스 소설이라는 게 지금이야 흔하지, 당시에는 귀했다. 웹소설시장이 그렇게 발달하지도 않았고, 출간된 소설도 많지 않았다. 시판 소설을 섭렵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나의 허기짐(?)은 끝나지 않았고, 끝없이 '차원이동 로맨스 소설 추천'을 검색했다. 그때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한 인터넷 카페 게시글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차라리 직접 쓰는 건 어떠세요?>.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당시 로맨스 소설을 찾아 인터넷의 파도를 헤엄치던 나에게는 신내림과 같은 깨달음이었다. 그래! 자급자족! 자급자족을 하자! 그렇게 나의 글쓰기가 시작됐다.
소설이라 할 것도 없는 첫 소설은 단편 누아르 멜로였다. 조직에 소속된 남주인공에게 가족의 복수를 위해 접근한 여주인공, 그들은 서로를 알아가며 은은한 동지의식을 쌓게 되는데, 특이한 것은 가족이 없는 그들에게 한상에서 밥을 먹는 것은 가족, 내지는 그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공감이 있었고, 중후반까지 둘은 겸상하지 않는다(이게 무슨..). 훗날 여주인공의 정체(?)를 알게 된 남주인공은 본인의 과거를 청산하고 떳떳이 여주인공과 겸상하고자 했고(이거 맞나..?), 여주인공도 마음을 열게 된 그 순간! 때마침 찾아온 여주인공의 생일, 여주인공은 본인의 생일상을 한 상에 차려놓고 남주인공을 기다린다. 그러나 여주인공에게 줄 선물을 사 그녀에게 가던 남주인공은 조직의 피습을 받게 된다. 여주인공은 영문도 모르고 남주인공을 기다린다. 처음 같이 겸상할 식탁의 음식은 식어가는데, 여주인공은 하염없이 남주인공을 기다리는 장면에서 소설은 끝난다. 지금 보면 겸상에 미친 자들의 이야기 같은데, 그때의 나는 꽤나 심취해 있었다. 이 글을 쓰며 몇 번이나 눈물을 따흐흑 터트렸으니 말이다.
글 쓰는 것에 재미가 들린 나는 몇 편의 단편소설과 습작을 스케치한 후, 드디어 차원이동 장편 로맨스에 도전했다. 외국의 문화는 모르니, 쿨하게 조선시대로 보냈다. 기왕이면 격랑의 소용돌이 속으로. 조선 전기 수양대군의 계유정난 대결구도 때로. 따박따박 글을 적어가며 배경지식의 한계를 크게 느꼈다. 나는 고민 없이 동네도서관을 향했다. 며칠 만의 외출인지 신경도 쓰지 않고 관내 조선 전기 역사서를 찾아보았다. 도서관에 있는 자료를 다 읽으니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복학신청을 했다. 내가 다닌 대학의 도서관은 규모가 컸고, 그 안에는 조선왕조실록이 있기 때문이다. 개강날부터 문종실록을 빌려 잡아먹듯 읽었다. 내 생애 가장 주체적이고, 가장 몰입했고,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자려고 누웠다가도 좋은 에피소드가 생각나 노트북을 열었다. 뭉근한 감정과 자연적 이미지를 표현할 노릇이 없어 화가 났고, 언젠가 날카롭고 정확한 단어가 생각나면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새로운 단어를 알아가는 게 재밌었고, 처음 듣는 단어면서도 마치 수년 전부터 내가 알고 있었던 것 마냥 반가움을 느낄 때도 있었다.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그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글을 쓰고 읽는 일이 질린 적 없는 것이다. 아니, 매일이 새로웠다. 그렇게 작가가 되고 싶었다. 조각하지 않은 자신으로 바란 첫 꿈이다.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말이 옆으로 튄 것 아닌가? 지금 이 이야기가 국회 보좌진과 무슨 상관이지? 심지어 꿈이 보좌진도 아니잖아? 반박을 못하겠으니 살짝 피해 가자면, 그때의 꿈이 어찌어찌 이어졌기 때문이다. 언젠가 보좌진의 업무에 대해 설명하는 일이 있겠지만, 미리 말하자면 나의 주 업무는 '글쓰기'다. 물론 나의 글이 아니라 남의 글이긴 하지만 말이다.
비정규직 공무원, 폐쇄적인 문화와 불합리한 관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에 있는 이유. 나는 나의 글이건 남의 글이건 글을 쓰는 순간이 아직도 질리지 않았고, 아직도 매일매일 새롭게 뿌듯하고, 그로써 살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렇게 한 달이 지나면 돈도 준다. 하루하루 불안한 비정규직에 괴상한 업무강도 이슈는? 애초에 그런 고귀한 걱정은 혈통에 없었다.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지내다 보면 언젠가 과거의 나처럼, 일찍 철들어야 하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시간을 찾아줄 방법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도 있다. 가난은 불행과 불안이 아니라, 그저 현상이고. 그 어떤 현실도 너의 가능성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꿈꾸는 것이 '감히'가 되지 않는 사회를 조금이나마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다. 물론 지금의 나는 크게 부족하지만 말이다.
작가가 된다면서 내 글 하나 없다는 것이 이따금 씁쓸할 때도 있다. 이런 것까지 써야 해? 미친다 미쳐, 혀를 내두를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난 이 일이 좋다. 참 애증스럽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긴 했나 보다. 회사에서 질리도록 키보드를 두드리고 집에 오면 글쓰기는커녕 활자 자체가 꼴도 보기 싫을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시간을 쪼개 이렇게 글을 남기고 있다.
이것도 재미있는 걸 보면 아직은 내 안에 어두운 방 안에서 말도 안 되는 겸상 로맨스를 쓰며 혼자 벅차했던 내가, 무거운 실록을 품 안 가득 안고 행복히 교정을 지나던 20대가 살아있나 보다. 아직은 더 쓰고 싶다. 남의 글이건, 나의 글이건. 요즘 부쩍 생동하는 기분이다. 유수같이 흘러라, 내 시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