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여행하는 시간
혼자 밥을 먹을 마땅한 곳을 찾고 싶을 때 내가 자주 찾는 곳이 시장이다. 시장통 안에는 상인들을 위한 국밥집 하나쯤은 있어서 혼자여도 실패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다섯 시간쯤 달려 하동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있었다. 마침 오일장이 서는 날이라 장 구경도 할 겸 점심을 먹기 위해 시장을 기웃거렸다.
하동은 일 년에도 여러 번 찾는 곳이어서 오일장의 풍경도 굉장히 익숙하다. 이곳에 오면 꼭 들르는 씨락국집이 있는데 새벽에 문을 열고 이미 장사가 끝난 시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을 찾느라 두리번거릴 때 팥죽집이 눈에 들어왔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팥죽인데 갑자기 왜 그게 먹고 싶었을까?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팥죽이 먹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 집의 풍경이 궁금했던 것 같다.
드르륵 옆으로 밀어서 여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할머니 한 분과 눈이 마주쳤다. "혼자인데 식사할 수 있을까요?" 어디를 가든지 꼭 묻는 말이다. 할머니는 앉으라는 눈짓을 보내셨고, 몇 개 되지 않는 테이블 하나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얼마나 오래된 곳일까? 곧 구멍이 뚫릴 듯 낡은 냄비들과 오래되고 손때가 묻은 가구, 양은 주전자의 구겨짐까지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어떤 걸 먹어볼까? 팥죽? 칼국수? 주문은 왜 안 받으시지?" 가게를 둘러보며 메뉴를 생각하고 있는데 오픈되어 있는 주방을 보니 할머니가 분주하시다. '아~ 메뉴에 선택권이 있는 게 아니구나~' 이런 작은 집들은 메뉴판이 있지만 단일 메뉴인 경우가 많기에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식당에는 할머니 두 분이 일을 하고 계셨는데 음식을 하시는 할머니께서 "옥아~"라고 부르니 밖에서 할머니 한 분이 "아이고~아이고~"하며 걸어 들어오셨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무릎이 아파 아이고~ 아이고를 연발하시는 옥이 할머니. 주인 할머니의 심부름은 그분 담당인 것 같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음식이 나왔다. 팥죽도 칼국수도 아닌 팔 칼국수다. 그런데 1인분이 아닌 2인분이 나왔고 할머니는 일행은 왜 안 오냐며 물으셨다. 분명 혼자 왔다고 말씀드렸는데 2인분이라니! 소심하게 "혼자인데요..."라며 말끝을 흐리니 그렇냐며 한 그릇은 쿨하게 가지고 가신다. 그렇게 내가 주문하지 않았지만 만들어지게 된 팥칼국수 1인분은 아직 식사를 하지 못한 옆집 아주머니께 배달이 되었다.
팥칼국수 한 그릇이 버려지지 않고 해결되었으니 이제 내가 집중할 차례. 손으로 직접 밀어서 만든 면은 흔히 먹는 칼국수보다 얇았고 소면보다는 굵었다. 적당한 굵기 때문인지 면과 팥 국물이 굉장히 잘 어우러졌다. 심심하지도 짜지도 않는 팥칼국수 한입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주인 할머니의 구부정한 뒷모습에, 수십 년을 곱게 썰었을 세월을 간직한 곱디고운 칼국수 면에 우리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 졌다.
이게 웬 청승이냐며 눈물을 꾹꾹 참고 팥칼국수를 먹었다.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이제는 어디 가서 팥칼국수 안 좋아한다는 말은 못 하겠다. 오랜만에 즐기는 최고의 한 끼를 맛있게 먹고 4,000원을 냈다. 2인분을 내겠다고 했더니 괜찮다며 4,000원을 받으신 주인 할머니. 잘 먹었다는 인사를 드리고 세월이 묻어나는 오래된 죽집의 문을 열고 나왔다. 다시 왔을 때도 꼭 이 맛있는 팥칼국수를 먹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