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말> 천인츠
언제부턴가 아침이면 손가락 마디마디가 뻣뻣해져서 구부리기가 힘들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그 결과는 무시무시했다. 내 증상은 손가락 조조강직이란 이름이 있었고 이건 류마티스의 전조라는 것이다.
류마티스는 어르신들이 걸리는 관절염 종류라고만 생각했는데, 내 나이대 여자들에게도 찾아오는 자가면역 질환이었다. 병이 진행되어 관절이 변형된 사진들을 보고 겁을 집어먹은 나는 부리나케 정형외과로 달려갔다.
엑스레이 결과를 본 의사 선생님은 내 손가락 관절이 상태가 좋지 않다며 특히 왼손 약지와 소지는 나이대에 비해서 관절 사이 간격이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피검사가 필요하다고 해서 간호사 선생님이 피를 뽑아 갔다. 물리치료실에서 대기를 타던 나는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배가 너무 조이는 바지를 입었나? 바지를 골반에 걸쳐봤지만 소용없었다. 곧 토할 것 같이 속이 뒤집히더니 어지럽고 호흡이 가빠졌다. 간호사 선생님은 나를 침대로 안내하고 누워있으라고 했다. 아마 주삿바늘을 보고 놀란 탓일 거라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나는 썰고 자르고 피 튀기는 고어물도 즐겨보는 씩씩한 사람인데. "그런 걸로 겁내는 성격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숨을 쌕쌕거리며 한심하게 질질 짜고 있었다.
그런데 한 십 분이 지나고 나니 나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해졌다. 이제 괜찮아졌다며 간호사 선생님께 말하는데 여간 부끄럽고 머쓱한 게 아니었다. 그건 패닉 어택 같은 게 아니었을까? 다행히 검사 결과 류마티스는 아니었다. 하지만 손가락이 뻣뻣하고 아픈 증상은 한 달이 넘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사실 내 직업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반에 한 두 명 있는 '그림 잘 그리는 애'였고, 실력이 그렇게 대단치는 않지만 먹고사는 데에는 충분했다. 그런데 요즘은 손가락 통증 때문에 작업을 하기가 버겁다. 그래서 이번 가을은 유난히 우울하고 불안하다.
어제는 남편이 쭈굴대는 나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강 건너 건물이 뿌옇게 흐린 풍경이 몇 분 지나가고 우리는 스타필드에 도착했다. 영풍문고 가판대에 있던 논어를 뒤적거리는데,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그런 말이 있었다. 배고플 때 먹을 것이 있고 졸릴 때 몸 뉘일 곳이 있다면 그 외에 것으로 번민하여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것은 어리석다. 나는 그 페이지를 남편에게 보여주며 2021년 대한민국에서 가당키나 한 말이냐고 했다. 남편은 코코 샤넬이 했던 말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상대를 외모로 판단하지 마라. 하지만 명심해라. 당신은 외모로 판단될 것이다.
기적적으로 내가 어떤 훌륭한 가치를 내면화하고 실천하는 데 성공한다 치자.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못하니 옛 성현들의 말은 현실적으로 보면 뜬구름 잡는 소리라는 것이다. 그렇다. 코인 값이 요동치고 부동산 가치가 폭등하는 21세기 자본주의 시대에 안빈낙도하라는 말이 와닿기가 쉽지 않다.
집에 돌아와서는 사놓고 한 번도 읽지 않은 <장자의 말>을 집어 들었다. 서점에서 본 뜬구름 잡는 소리가 어째 좀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내가 소양이 없다 보니 이 책이 좀 어려웠다. 또 번뇌와 거의 혼연일체가 된 나에게는 장자의 탈세속적인 메시지가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그러다가 거대한 고목에 대한 이야기를 마주쳤고 나는 책을 읽는 것을 잠시 멈추었다.
<인간세>에서는 남백자기가 상구에 가서 커다란 나무 한그루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나무는 무척이나 커서 나무 그늘이 천 대의 수레에 드리울 정도였습니다. 다시 자세히 보니 나뭇가지가 너무 굽어서 기둥으로는 쓸 수가 없고, 나무 아래 둥치는 가운데가 찢어져 있어서 관목으로 쓸 수도 없었습니다. 잎을 맛보니 혀가 다 썩어 문드러질 지경이었고, 냄새를 맡으니 사흘은 족히 쓰러져있을 만큼 지독했습니다. 그래서 남백자기는 탄식을 하며 말했죠.
"이 나무는 재목으로 삼을 수 없겠구나.
그래서 이토록 크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이야."
<장자의 말> 천인츠
장자는 반대로 그렇게 말했다. "이 나무는 재목이 되지 못하여 천수를 누렸구나!" 이 이야기의 메시지는 그것이다. 인간에 의해 정해진 필요와 불필요의 기준은 자연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여기서 '그래! 설령 그림을 못 그리게 된다고 한들 내 가치가 없어지는 게 아니야!'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지 못했다. 내가 바로 그 구불어지고 냄새 고약한 고목인 것 같아서 몹쓸 자기 연민에 빠져버렸다. 오늘 정형외과 가는 길에서도 운전대를 잡고 있는데 괜히 울적해져서 눈물이 났다.
쓸모없는 나무. 쓸모없는 나.
젊은 시절 우리 할머니는 아주 대단한 분이셨다. 대화를 하면 9할 9푼은 당신의 자랑이었는데, 예전에는 그게 그렇게 듣기 버겁더니 요즘은 자랑 지분이 줄어드는 게 너무 속상하다. 집안 살림 불리고, 땅도 야무지게 사 모으고, 취미로 못하시는 게 없던 우리 할머니는 이제 밥을 먹고 소화시키는 것도 애를 쓰셔야 한다.
재주가 많던 사람이 무력해지면 얼마나 괴로울까. 난 가진 재주가 그림 그리는 것뿐이라도 혹시 잃게 될까 이렇게 조바심이 나는데.
"우리 할머니가 제일 곱고 예뻐."
"우리 할머니 못하는 게 없지."
"그런 생각하지 마. 우리 할머니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그렇게 울적해하는 할머니를 위로하고 있지만, 나도 내 쓸모가 꺾어지는 것이 너무 두렵다. 뜬구름 잡는 소리가 주는 위로에 마음을 뉘이려 하면 속세가 빨리 달리라고 날 채찍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