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에 ‘서점’이라고 대답하는 것에는 거창한 곳을 다닐 여력이 되지 않아도 궁색해 보이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다. 여윳돈이 꽤 있던 시절에 생긴 취미였는데 그때는 지적인 허영심, 즉 ‘있어 보인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사실 드라마나 게임을 더 좋아했던 시기라 서점 가판대를 기웃거리며 호평일색인 책들을 들었다 놨다 해도 글자가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괜히 내가 올 곳이 아닌 것 같아 눈치가 보였다. 나는 시각적인 매체에 완전히 길들여져 있었다.
서점을 자주 드나들게 된 또 다른 이유는 괴팍한 독서가 남자 친구 덕분이다. 내가 여행을 통한 직접적인 체험을 찬양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저서를 통한 간접경험이 훨씬 값지다.”며 일침을 놓고는 했다. 당시에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에서 이런 대목을 보고 마음이 동했다.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 더 명료해진다.
완독하고 한참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런 관념적인 형태의 여행이 완전히 와 닿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책에 의하면 먼 과거의 귀족들이 모험을 감수해야 하는 힘든 구경은 하인을 시켜 다녀오게 했다는데, 그렇다면 남자 친구의 간접경험을 통한 여행 방식에는 유구한 전통이 있는 것이다. 이 말을 전했을 때 남자 친구가 얼마나 의기양양했는지, 그로 인해 내가 얼마나 아니꼬워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요즘 같이 피부가 타는 듯이 뜨겁고, 습한 공기가 기관지에 턱턱 걸리는 날씨에는 경치가 좋은 곳에서도 도무지 여유를 가지기가 어렵다. 사실 게으르고 범속한 내가 요즘 제일 선호하는 여행지는 백화점이나 아웃렛이다. 이물감 없는 공기와 더불어 어느 지방으로 가나 익숙한 내부 구조가 예민한 우리의 경계심을 누그러트리는 덕택에 평온한 한 때를 보낼 수 있다. 주차비가 무료면 땡큐고, 무엇보다도 내부에 서점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다. 책 내음을 맡고 모여든 조용한 이들 사이에 있으면 서로 눈 마주치는 일 한번 없어도 기묘한 동지애가 느껴진다.
롯데백화점 구월점에서 인천터미널역으로 연결된 지하에 영풍문고가 위치해 있다. 리모델링을 해서 제법 세련미가 보이는 지상층에 비하면 지하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부터는 세월이 엉겨 붙어 시대와 성기는 느낌이 난다. 멋 부리는 곳 하나 없이 정형화된 이곳 영풍문고가 묘하게 끌리는 이유는, 올 때마다 가판대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집에 있는 책장이 꽉 차서 웬만하면 전자책으로 읽게 되는데, 여기에 오면 이상하게 그 자리에서 사게 되는 일이 잦다. 혹시 마음이 통하는 서점이라도 있는 걸까?
<여행의 이유>는 출구 가까운 가판대 위에 있었다. 이 책의 첫 페이지는 재미있는 소설의 도입부처럼 보는 이에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의문을 던진다. 상하이 푸둥공항에서 추방당한 김영하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티켓을 사고 있다. TV 프로그램을 통해 그가 보여준 지적이고 온화한 이미지는 이 책을 집어 든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을 테니 별다른 캐릭터 설명 필요 없이 첫 페이지가 곧 반전이 된다.
이 책은 더위와의 투쟁에 굴복한 나에게 좋은 휴가가 되었다. 김영하의 유려한 문장은 사진 한 장 없어도 선명하게 당시의 풍경을 전한다. 관념의 세계에서 그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으면 그 뛰어난 이가 여행을 통해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특유의 온화한 목소리로 들려온다.고생 없이 떠나는 여행이 주는 이상한 배덕감은 다섯 번째 챕터의 간접 여행에 대한 철학적 고찰과 찬사를 읽고 나서 눈 녹듯이 사라졌다.나는 뽀송한 침대에 육신을 뉘이고 갓 우려낸 시원한 보리차를 홀짝이며 여행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에게 여행의 의미는 공기가 탁한 봄철의 환기 같은 것이다. 미심쩍은 바깥공기를 집안에 들이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아도 정체됨이 나에게 해롭다는 것을 알기에, 예민한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바깥으로 나설 채비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점을 여행하는 것은 가장 알맞은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