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바위 얼굴

언제쯤 내 얼굴에 책임을 질 수 있을까?

by 길벗 스토리텔러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때가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막연하게 중고등학생 시절 무렵부터 보거나 들어왔던 것으로 기억나는 그 말을 나는 우리나라 속담 정도로 알고 있었다. 훗날 저 유명한 링컨(Abraham Lincoln/미국의 13대 대통령)의 말이라는 말을 듣긴 했는데, 그 출전에 대해서는 지금도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각료를 선발할 때인가, 추천된 사람의 얼굴을 보고 링컨이 거부하면서, 마흔 살 이후에는 사람이 살아온 과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을 근거로 들었다는 것이 이야기의 뼈대이다. 한 마디로 얼굴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 판단만으로 추천된 사람을 탈락시켰다는 이 일화는 자칫 링컨을 선입관에 좌우되는 인물로 보이게 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나는 링컨의 이미지에 손상을 입힐만금 위험한 이야기가 떠돈다는 게 말이 되냐는 상식적인 회의에서라도 이 일화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링컨의 말이라는 출전을 믿지 않을 뿐, 사람의 얼굴이 살아온 역정이나 겪어낸 풍파를 어느 정도 반영한다는 점에는 동의하는 편이다.


“얼굴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건너다닌 말에 불과한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사람은 많을 것이다. “사람의 얼굴은 열두 번 변한다”는 우리 속담도 얼굴 모습이 살아가는 처지와 태도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점을 비유적으로 일러준다. “20대의 당신 얼굴은 자연이 준 것이지만, 50대의 당신의 얼굴은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코코 샤넬의 말도 그렇다. 내 맘대로 해석하건대, 자신을 사랑하며 내적 가치를 추구한 사람은 인생 후반쯤 되면 어떤 형태로든 그 성과가 얼굴에 드러난다는 말로 이해한다. 반드시 미용적 노력을 강조한 말에 그친다고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처럼 나이 든 사람의 얼굴에 그 사람의 살아온 역정(歷程)이 반영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20231016_122859.jpg

미국의 소설가이자 외교관, ‘주홍글씨’의 작가로 유명한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 1804~1864)’의 ‘큰 바위 얼굴(Great Stone Face)’은 내가 중학교 시절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이다. 작가의 이름을 ‘너새니얼 호손’이라 표기하고, ‘어네스트’를 ‘어니스트’로 표기하는 것 정도만 다를 뿐, 지금도 번역본으로 많이 읽히고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라 알고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바위 얼굴’이 얼굴 큰 사람을 놀리는 우스갯말로 쓰이고, 머리 큰 사람들을 위한 빅사이즈(Big Size) 모자 상호로도 꽤 유명한 걸 보면. 세대 불문 다 아는 이야기지만, 기억이 감감할 듯도 하니 줄거리를 한번 되새겨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간추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마을에 ‘어네스트(Ernest)’라는 어린 소년이 살고 있었다. 마을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곳엔 ‘큰 바위 얼굴’이라 부르는 사람 얼굴 모양의 바위산이 있었고 소년은 이 마을에 전해오는 바위산 전설을 어머니로부터 들으면서 자랐다. 사실은 가파른 언덕 위에 몇 개의 바위가 간격을 두고 놓여 있는 자연 형상에 불과하지만, 멀리서 보면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는 이 바위산을 두고 사람들은 마치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인 양 존중했다. 언젠가는 저 바위산과 닮은 위대한 인물이 이 마을에 나타나 마을사람들을 잘 살게 해줄 것이라는 이야기는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모두의 믿음으로 자리 잡기까지 했다. 어네스트는 누구보다 더욱 저 바위산과 닮은 위대한 인물이 마침내 현실로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소년이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바위를 바라보며 마음에 평화와 위안을 얻으며 평생 성실하게 살아가는 그의 일생 속에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이라 기대하는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이 열광했지만, 돈 많은 상인 개더골드(Gather Gold), 전쟁 영웅 올드 블러드 앤드 선더(Old Blood And Thunder/피와 천둥의 노인), 대통령이 되려는 정치가(the Statesman) 세 명 모두 ‘큰 바위 얼굴’의 실제 인물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만다. 그때마다 실망했지만 어네스트는 여전히 큰바위 얼굴과 같이 따스하고 평화로운 표정을 가진 인물을 다시 기다린다. 목수 일에 성실히 종사하면서 모든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하며 살아가는 동안 어느덧 세월이 흐르고 그는 주위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는 지도적 인물이 되어 있다.


노년기에 들어서 목수 일도 은퇴하고 사람들에게 좋은 말과 가르침을 들려주는 마을의 큰 어른이 되어 있는 그에게 유명한 시인이 찾아온다. 네 번째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이라 기대 받는 인물이었지만, 시인은 다른 세 명과 다르게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어네스트의 집을 찾아온다. 겸손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시로 옮기는 그에게서 나름 훌륭한 성품을 발견하지만 결국 자신이 기다리던 큰 바위 얼굴은 아니라고 판단한 어네스트에게 서운해 하기는커녕 스스로 예언의 인물이 아님을 인정하는 시인은 어네스트의 가르침을 들으러 계속 찾아와 교유하며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시인은 놀라운 발견을 한다. 어네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이라는.


설교를 하러 단상에 오른 어네스트를 가리키며 사람들에게 어네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의 실제 인물 아니냐고 말하자 사람들 모두 바위산과 어네스트를 번갈아 보며 놀라워하며 공감한다. 어네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의 실존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정작 어네스트는 언젠가 자신보다 훌륭한 인물이 큰 바위 얼굴과 똑같은 모습으로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고는 단상에서 내려온다.


다시 읽어봐도 소설에서 어네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이라고 확실히 밝혀지는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소설 속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정작 어네스트 자신은 그 주인공을 여전히 기다린다고 할 뿐이니. 결국 작가는 독자에게 상상의 나래를 달아준 셈, 결국 해석은 우리 몫이다.


이 소설이 큰 반향을 일으키자 독자들 중 ‘큰 바위 얼굴’의 실제 모델이 된 마을과 바위산이 실제로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곳이 어딘지 찾아나서 여러 곳이 특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사람 얼굴을 닮은 바위야 찾아보면 있을 만도 하지만, 우화(寓話)임이 분명한 이야기 속 장소를 찾는다는 일이 어찌 보면 바보 같고 어찌 보면 순수하게도 보인다. 굳이 그 장소가 있다면 사람들의 마음 속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자하고 사랑이 넘치는 얼굴을 가진 누군가를 정말 좋아하고 존경해서 평생 하루도 빠짐없이 마음에 품고 산다면, 그와 비슷한 얼굴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큰 바위 얼굴’은 어린 시절의 어네스트의 눈에 익은 산의 형상이었으나,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새겨진 얼굴이 되었고, 기다리는 사람보다 닮고 싶은 사람의 인상으로 각인되지 않았을까. ‘나다니엘 호오손’은 이 소설에서 존경하는 누군가를 흠모하여, 그를 닮고자 노력하는 일은 어쩌면 마음 속 바위산에 그의 표정을 새겨 매일 자신을 돌아보며 비교하는 일이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세상엔 어른이 없다.” 또는 “닮고 싶은 사람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어른’이든 ’닮고 싶은 사람‘이든 ’호손‘의 우화 속 ’큰 바위 얼굴‘로 바꿔 말해도 무리 없을 성 싶다. 한편 이런 반성도 있다. 닮고 싶은 사람이 없는 세상을 한탄하지만 말고 “나는 누구에게 닮고 싶은 사람이었는가”를 되물어야한다는 생각. ’큰 바위 얼굴‘이나 ’어른‘처럼 상징적이고 거창한 존재가 되지 못했음을 자책하자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내가 선생이라면 학생에게, 종교 지도자라면 교인에게, 정치가라면 유권자에게, 부모라면 자식에게 어떤 얼굴로 새겨져 있을까. 돌아본 내 얼굴이 썩 맘에 들지 않는다면 지금부터라도 일그러진 표정, 교만한 태도 조금씩 깎고 다듬어 죽기 전까지는 스스로에게 책임지는 얼굴을 만들어보자고 다짐해보자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