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자락 따라 걷고 보고-1

광화문과 경희궁

by 길벗 스토리텔러

"광화문 아이들"을 아시나요?


인왕산 자락길을 걸으려면 서촌이나 사직단에서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등산보다는 길 위에서 이야기를 찾아 들려주는 나로서는 광화문에서 출발하여 한양도성 돈의문 쪽으로 내려오는 한양도성 서쪽 날개를 따라 올라가는 길이 흥미롭다. 경희궁, 돈의문, 홍난파 가옥, 딜쿠샤 등 볼거리, 이야기거리가 넘치기 때문이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7번 출구’로 나와서 경희궁 방향으로 걸으면서 예전 유명했던 광화문통 명소들을 떠올리는 것도 올드보이들에게 꽤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서울 사는 친구들과도 몇 번 이 길을 함께 걸었는데 '포시즌스호텔'을 보고 “어? 이 큰 건물이 언제 생겼지?”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서울이 워낙 커서 광화문 근방에 나와 볼 일 없는 건지, 하도 생겨나는 것들이 많으니 둔감한 건지 모르겠다. 저 큰 건물이 지어지기까지 뒤편 골목 작은 건물들과 단골식당들에 “철거 반대”, ‘보상’... 이런 현수막들에 내건 구호들이 수년간 이 지역의 '핫이슈'였다는 사실을 잘 아는 나이지만, 완공된 이후에도 세계적인 체인 소속 호텔이라는 건물의 용도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건물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선 낯선 이름의 오성급 호텔 ‘포시즌스’라는 사실이 주입된 계기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2016년 3월, 총 5회에 걸쳐 알파고(AlphaGo)와 이세돌 9단이 펼친 세기적 대국이 그 것이다. ‘포시즌스호텔 특별대국장'이라는데 도대체 이 호텔의 정체가 궁금하여 검색해보고 나서야, “저기가 거긴가” 식으로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길 주변은 우리나라 기성화 시대의 문을 연 제화업계의 전설 금강제화를 비롯 덕수제과, 크라운제과 등이 있던 곳이다. 광화문 네거리, 흔히 ‘동화면세점’ 건물로 부르는 ‘광화문빌딩’ 자리에 있던 유명한 개봉관-'국제극장' 주변 번화한 거리와 마주 보는 젊음의 거리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주로 ‘노땅’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었던 다방과 달리 대형 제과점들은 세대를 달리한 만남의 장소였다. 오늘날의 '별다방, 콩다방에 비교한다면 과장일까. 아무튼 최신 유행을 선도하는 브랜드 기성화 1호점, 대형 제과점이 즐비했던 1970년대의 이 거리는 명동과 견주는 젊음의 거리였다. 재수생들 다니는 학원 포함 많은 입시 학원들이 밀집해 있었고, 수많은 청춘들이 모이고 스쳐가는 지역이어서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광화문통 아이들'이란 말도 자연스럽게 쓰였다. 실제로 이원세 감독 작품으로 1976년 개봉한 영화 '광화문통 아이들'도 있었으니까. 물론 그땐 '강남'이 없었다. 대형 제과점의 대표 격인 '덕수제과'의 흔적이 그 자리에 ‘덕수빌딩’이라는 건물명으로 남아 있어서 반가웠다. 조금 더 걸어가면 깜짝 놀랄 변신의 현장이 또 있다. 새문안교회.


1887년 9월, 언더우드 목사에 의해 그가 기거하던 집 사랑채에서 출발했다가 이곳에 세운 우리나라의 첫 장로교회이다. 같은 시기 언더우드와 함께 들어온 아펜젤러 목사가 감리교회를 세운 것도 같은 해 10월이라고 한다. 역시 아펜젤러의 집 사랑채 규모로 시작한 감리교회는 오늘날에도 건재한 정동교회로 발전하였다. 새문안교회는 예전에는 인도(人道)에 접해 담과 정문이 있고 그 안의 길고 넓은 마당 저 편에 계단 많은 교회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언뜻 교회로 보이지 않는 세련되고 웅대한 초현대식 건물로 변신하였다.

광화문 거리, 새문안교회, 한글가온길 표지석


새문안교회를 지나면 신호등이 있는 작은 도로를 건너야 하는데 여기가 ‘한글가온길’로 이름 붙은 길의 한쪽 끝자락이다. 한글가온길은 이곳부터 직진,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횡단보도와 금천교시장 입구를 지나 ‘세종대왕 생가터’ 표석까지 이어진다. 결국 이 길은 '훈민정음'을 만드신 세종대왕 나신 곳부터 '한글' 이름 붙이신 주시경 선생 집터를 지나 바로 이 근방 '한글회관'까지 한 테마를 는다. 횡단보도를 지나면 정면에 서울역사박물관이 보인다.

광화문 네거리/망치질하는 사나이/덕수제과 자리/새문안교회/한글가온길

경희궁(慶熙宮)과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광장은 담이 없으니 문도 따로 없지만, 구세군회관 앞을 지나 광장으로 들어서는 통로가 정문에 해당한다. 지금은 여기 없지만 경희궁의 옛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이 서 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려주는 ‘흥화문터’ 표석이 구세군회관 빌딩에 바짝 붙어 있다. 거기서 몇 걸음 더 걸으면 마치 궁궐에 들어서는 듯 넓고 화려하게 장식한 다리를 건너 광장으로 진입한다. 실제 물도 없는 곳인데 상징적으로 복원해놓은 물길이며 다리로 보인다. 흥화문 표석 부근부터 서울역사박물관 영역을 포함, 좌측의 서울특별시교육청, 우측 신문로 주변 대한축구협회 지나 '경희궁의 아침'이라는 아파트 단지를 망라한 영역이 경희궁(慶熙宮) 터라 하니 그 규모가 적어도 창덕궁보다는 넓지 않았겠냐는 추측을 해본다.


고종 즉위 후 경복궁 중건 사업의 목재 충당을 위해 전각을 허무는 등 폐허를 자행한 이후까지도 여기 남아 있던 경희궁 정문 흥화문은 장충단에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을 기리는 사찰, 박문사(1932년 완공)의 문으로 팔려간다. 광복 후 박문사가 헐리고 그 주변이 영빈관을 거쳐 신라호텔로 바뀌어도 여전히 호텔문으로 남아 있던 흥화문은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1988년 경희궁터로 돌아온다. 그러나 제 자리엔 구세군회관 등 다른 건물이 서 있어 강북삼성병원 쪽으로 간다. 경희궁터이긴 해도 제 자리 아닌 옛 서울고등학교 정문 자리로 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경희궁 탐방은 흥화문이 ‘있던 자리’로 들어가서, 흥화문이 ‘있는 자리’로 나가는 셈이 되겠다.

구세군회관 옆에 바짝 붙은 흥화문 표석과 안내문, 그리고 금천교 건너 보이는 서울역사박물관


금천(禁川)은 어느 궁궐이든 정문을 들어서면 마주치는 개울을 부르는 이름이다. 그 위에 놓인 다리 금천교(禁川橋)를 건너 궁궐로 들어서게 되어 있다. 성(聖)과 속(俗)을 가르고, 공과 사를 구분하는 양, 5대 궁궐 모두에 놓인 상징적인 물길이다. 의미와 발음은 마찬가지인데 경복궁과 덕수궁, 경희궁은 금할 금(禁)자를 써서 ‘禁川’, 창덕궁은 비단 금(錦)자를 써서 '錦川'이라 한다. 창경궁의 경우는 좀 다르게 '옥천(玉川)'인데 ‘비단 같이 곱고, 옥같이 맑고, 속됨을 삼가라’는 의미라면 모두 통하는 바가 없지 않다. 경희궁의 금천교는 2000년대 초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이 다리를 건너 서울시역사박물관 광장으로 들어서 보자. 박물관 입구 한 편에 단청색 아직 선명한 한옥 건물 지붕이 해체된 채 구조별로 놓여 있고, 해설판도 서 있다. 현재 광화문을 복원하기 전 그 자리에 있던 옛 광화문의 문루(門樓)이다. 그런데 이 문루가 목조 아닌 시멘트로 되어 있어 의아하다.


광화문의 역사는 거기 들러 언급할 기회가 따로 있겠지만 한 마디로 기구하다. 일제가 총독부 청사를 광화문 안에 지으면서 완전히 헐려다가 반대 여론이 높자 현재의 삼청동 쪽에 있는 민속박물관 정문께로 옮겨 놓았다. 6.25때 문루는 불에 타 없어지고 육축(陸築/큰 돌로 쌓은 부분)만 훼손된 채 흉물로 남아 있던 것을 1968년 시멘트로나마 문루를 만들어 옛 자리에 복원시켰다고 한다. 콘크리트 광화문도 한 자리에서 수십 년의 역사를 간직했으니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 옆에는 과거에 철거한 고가도로 표석 등 유물이 있고, 넒은 광장 저편에는 전차 등 흥미로운 유물들도 꽤 많이 전시되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광장과 옥외전시물들


박물관 건물의 좌측 모퉁이를(가는 길 방향으로 우측) 돌면 주차장이다. 거기서 계단을 오르면 복원된 경희궁과 그 앞 넓은 마당이 펼쳐진다. 저 마당도 온갖 전각이 들어섰던 자리이며, 장기적 과제로 삼아 모두 복원할 계획이라 한다. 경희궁으로 가기 위해 주차장에서 계단을 오르자 느티나무의 멋진 형상이 눈에 들어 온다. 한쪽은 온전해 보이는데 반대편은 납작할 정도로 파인데다 내부가 시멘트로 채워져 있고 앞뒤를 관통하는 구멍이 뚫려 있으니 신기하다. 몰골이 흉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다. 썪은 내부를 시멘트로 채우고 버팀대를 받쳐 놓은 나무를 많이 보았지만, 이 나무는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빚어졌다는 듯 자태가 의젓한 것이다. 구멍을 통해 양면에서 보이는 풍경을 촬영하는 이들이 눈에 띈다.

복원된 경희궁의 치조 일원

궐 전각은 최근 경희궁의 치조(治朝) 일부를 복원한 것이다. 치조란 궁궐에서 임금이 정사를 보시던 중심 공간을 말한다. 정전과 그 앞 품계석이 박힌 조정(朝廷), 뒤쪽의 편전을 아우르는 곳. 경희궁의 건축과 해체까지의 약사(略史)를 알아보기로 한다.


경희궁 이야기


경희궁(慶熙宮)은 광해군 때 지은 궁궐이다. 경복궁과 창덕궁 두 궁궐이 모두 불타버린 임진왜란. 의주까지 몽진했다 환도(還都)한 선조(宣祖)가 당장 기거할 곳이 없자 월산대군의 사저를 중심으로 급조한 정릉동 행궁(훗날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 머무르며, 비용 문제 때문에 경복궁과 창덕궁 중 창덕궁 하나만 택하여 중건(重建)한다. 선조가 창덕궁의 완성을 못 보고 세상을 떠난 직후(1609년) 창덕궁으로 이어한 광해군은 어려운 나라 살림에도 새로운 궁궐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진다. 창덕궁을 탐탁치 않아했던지 또는 궁궐 욕심이 많았는지, 아니면 권위에 대한 집착이 컸는지 모를 일이지만.


인왕산 밑에 새 궁궐을 지으면 태평성대가 온다는 말을 믿고 지금의 사직동, 필운동 일대에 새 궁궐을 짓기 시작하는데 그 궁궐이 지금은 흔적조차 없는 인경궁(仁慶宮)이다. 인경궁 궁역도 사직단 부근에서 배화여중고등학교를 거쳐 효자동 일대를 아우르는 넓은 터였다고 한다. 인경궁 공사가 채 마무리 되지도 않았던 때, 바로 이 자리-새문동(塞門洞)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말을 듣고, 또 새 궁궐을 지으라 명해 세운 것이 경덕궁(慶德宮/훗날 경희궁으로 명칭 변경)이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를 보면 두 궁궐을 병행해지으면서 자재와 경비가 딸려 이곳도 저곳도 공기(工期)를 맞추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기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인경궁 공사를 포기하고 경덕궁으로 갈아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왕기(王氣)가 서렸다는 말은 상서로운 바위라는 의미를 가진 서암(瑞巖) 때문인데 그 아래에 광해군의 배다른 동생인 정원군(광해군은 공빈 김씨의 아들, 정원군은 인빈 김씨의 아들)의 집이 있었다. 결국 정원군 집은 물론 인근 민가들 수백 채를 졸지에 쫓아내고 궁궐 공사를 강행한 모양이다.


[능원군 이보는 상의 아우이고, 사는 집이 경덕궁(慶德宮) 안에 있었는데 곧 상의 잠저(潛邸) 때의 옛 집이다. 집 뒤에 암석이 있는데 일찍이 폐조 때에 3일 동안 낮이나 밤이나 은은하게 마치 용이 우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났으므로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다. 이에 술사(術士)가 광해에게 말하기를 ‘이는 곧 왕자(王者)가 살 곳이니 궁실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으므로, 광해군이 그 말을 기쁘게 여겨 즉시 궁궐을 세우면서 근방의 사민(士民)들로부터 집을 모두 빼앗고(조선왕조실록-인조실록 7권, 인조 2년 12월 22일 임인 5번째기사)]


여기서 상(上)이란 인조 임금이고, '능원군 이보'는 정원군의 들째 아들(3형제 중 장남이던 인조의 바로 아래 동생)이며, 경덕궁(慶德宮)은 영조 때 개명되기 전 경희궁의 이름이고, 잠저는 왕이 되기 전 살던 집, 폐조(廢朝)는 폐위된 임금 즉, 광해군의 시대를 말한다.


광해군의 이복 동생인 정원군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으니 능양군·능원군·능창군이 그들이다. 그 중 영특하기로 소문났다던 막내 능창군이 1615년(광해군 7) 6월, 왕으로 추대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고변(신경진의 옥사)에 연루되어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17세의 나이에 자결하자, 상심한 아버지 정원군은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얼마 못 가 죽게 되고 큰형인 능양군은 이를 갈며 광해를 증오한다. 광해군이 정원군의 집을 빼앗은 이후의 일이다.


결과론이지만 예언이 들어맞은 것으로 봐야할까. 1623년(광해군 15) 3월 13일, 정원군의 맏아들이자 능창군의 큰형인 능양군은 서인 세력이 주도한 반정에, 친히 연서역(지금의 역촌역 근방)에 군사를 끌고 나가는 등 주도적으로 가담하여 숙부인 광해를 폐위시키고 등극하니 그가 곧 인조이다. 능양군이 왕이 되었으니 새문동 정원군 집터 부근 서암에 왕기가 서렸다는 말이 맞기는 한 모양이라고들 하는데 어찌 보면 예언 그 이상이다. 이 집에서 인조 말고 추존왕이지만 엄연히 종묘에 배향된 왕이 한 사람 더 나왔으니 말이다. 인조는 등극한 후 아버지를 ‘정원대원군’으로 추존함에 그치지 않고 숱한 논쟁과 반대를 13년이나 견디고 뜷어 마침내 왕으로 추증하고는 묘호 ‘원종(元宗)을 바쳤다. 사가(私家)였던 이 터에서 왕이 두 사람이나 나온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인조와 원종 부자의 한글 능호(陵號)가 '장릉'으로 같다는 점이다. 조선 제16대 임금은 파주 장릉(長陵)에, 그의 친부이자 추존왕 원종은 김포 장릉(章陵)에 묻혀 계신다. 내가 알기로는 한글로 ’장릉‘이라 표기하는 조선 왕릉은 강원도 영월에 있는 조선의 6대 왕, 단종의 ’장릉(莊陵)‘을 더하면 모두 3곳이다.


처음 건립할 때는 왕이 본궁을 떠나 잠시 머무르는 성격의 이궁(離宮)으로 지어졌으나, 이 궁을 사랑한 왕들이 많아 정사를 본 기간도 꽤 길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해 동궐(東闕)이라 부르던 데 대해 서궐(西闕)이라 부르기도 한다. ’서궐도(西闕圖)‘는 고려대학교와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당시 규모와 구조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어 복원 작업의 밑그림이 되고 있다고 한다. 서궐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의 대강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9대 숙종 탄생과 승하, 20대 경종 탄생, 21대 영조 승하, 22대 정조 즉위, 23대 순조 승하, 24대 헌종 즉위 등. 특히 정조의 암살 미수사건의 현장이며, 정조가 세손 시절 쓴 ’존현각일기‘의 그 존현각(尊賢閣)도 경희궁에 있던 전각이다.


경희궁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 일본인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해 경성중학교가 설립되면서 전각들이 강제로 철거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사실 경희궁의 철거는 대원군 집권 후 경복궁 중건이 시작되자마자 헐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2019년 완역된 ’경복궁 영건일기‘에 분명히 나와 있다고 한다. 1863년 경복궁 중건 시작과 동시에 숭정전 포함 5개 전각만 남기고 모두 헐어 썩은 자재는 버리고 좋은 목재는 새 전각의 자재로 사용했다. 바닥에 깐 박석도 뽑아서 광화문 앞에 이설했으며, 1865년 경희궁 대지를 몇 관청의 부식 조달을 위한 채마밭으로 분배함으로써 점차 폐허가 되어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이 터에 뽕나무를 심어 양잠원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뽕나무궁궐‘이라 부르기도 하였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에는 연병장으로 만들어 관병식(오늘날의 군사 퍼레이드)을 개최하기도 한다. 모두 1910년 이전의 일들이다.


현재 복원된 전각들은 정전인 숭정전을 중심으로 소수에 불과하거니와 모두 건물에 역사성은 없다. 정전인 숭정전(崇政殿)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계단을 올라 숭정문(崇政門)을 들어서야 한다. 숭정문은 정조가 즉위한 장소로 알려져 있고, 숭정전은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과 같이 국가적 의례가 열리던 정전이다. 경희궁이 이궁으로 건설되었으므로 숭정전은 외관상 중층이 아닌 단층이며 규모도 소박하다.박석이 깔려 있고 품계석이 서 있는 이 공간을 조정(朝庭)이라고 한다. 조정에 나아간다는 말이 곧 관복을 입고 이 자리의 품계석 곁에 선다는 뜻인 것이다.


궁궐에서 나라 다스림의 상징적 공간인 치조(治朝)의 중심은 정전이다.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경복궁을 중건할 때 해체하거나 이건하지 않은 다섯 전각 중 하나라고 언급한 바 있다. 후일 경성중학교의 교실로도 쓰이던 숭정전은 1926년 남산에 있던 일본의 불교 종파 ’조동종‘ 산하 사찰에 팔려 절집으로 쓰이다 근방에 다시 이건(移建)하여 현재는 동국대학교 교내 법당인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다. 경희궁을 복원할 때 흥화문과 같이 원 자리로 옮길 것을 검토하기도 하였으나 지나치게 노후하여 포기하였다고 한다.


숭정전 뒤에 있는 자정문(資政門)을 들어서면 편전(便殿)인 자정전(資政殿)이다. 정전(正殿)이 대규모 회의나 국가적 의례를 진행하는 공간이라면 편전(便殿)은 임금이 일상 업무를 처리하는 사무실이다. 경복궁으로 치면 근정전 뒤편 사정전(思政殿)에 해당한다. 자정전을 지나 옆에 있는 문을 또 나서면 펼쳐진 넓은 공터에 너른 바위가 보인다. 이 바위가 문제의 서암(瑞巖)이다. 왕기가 서려 있다는 바로 그 바위라는데 뭐 대단한 생김새도 아니다. 한때 왕암(王巖)으로 불리던 것을 숙종 임금이 서암으로 바꿔 부르라 했으며 친히 ’瑞巖‘ 글씨를 내려 새겼다고 한다. 아마 이 후원 전체보다 더 큰 바위 덩어리였을 것이라 짐작한다. 북서쪽 모서리에는 처마처럼 들린 바위의 형상이 있는데 아래에 샘이 있고 거기서 흘러내리는 물길이 있다. 물길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인위적으로 파서 만든 것 같다. 후원 아래의 전각 태령전에는 당시 영조의 어진이 걸려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하여 현재도 족자형태의 초상화를 봉안해두었다.


다시 숭정문을 나와 계단 옆 왼편 계단을 오르면 뒷동산에 이른다. 복원된 숭정전 일곽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반대편으로 한 바퀴 돌 수 있다. 돌아내려오는 곳 언덕 아래 조그만 샘이 있고 한자 글씨가 새겨져 있다. 영렬천(靈冽泉). 선조의 글씨를 집자(集字/문헌에서 필요한 글자를 모아 조합)하여 바위에 새겼다는 글씨가 아직 선명하다.


내려오면 서울시교육청 후문과 그 안에 높은 교육청 건물이 보인다. 그곳 역시 경희궁터이다. 넓은 대지 위를 걸어 흥화문 쪽으로 나오면 여기저기 발굴 중인 흔적과 표식이 보인다. 이곳은 발굴과 복원을 위해 없애버렸지만, 과거 ’서울정도 600년기념관‘,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던 땅이다. 그리고 서울시교육청. 저 청사도 계획 상으로는 2026년 이내 이 곳을 떠나 용산구 후암동에 있는 예전 수도여고 자리 신축청사로 이전할 계획이다. 청사 노후화와 업무 환경 개선이 직접적인 사유이지만, 꾸준히 제기되어 온 경희궁 복원의 장기적 포석과 무관치 않다는 이야기도 있다.

앞에 보이는 흥화문. 사연 많은 흥화문을 통해 경희궁터를 벗어난다. 흥화문 앞 광장에서 큰 길로 나서면 정동사거리. 강북삼성병원과 정동입구, 경향신문사가 마주보고 있는 곳이다.


이어서 '인왕산 자락따라 걷고 보고-2'(돈의문 터-돈의문박물관마을-경교장-국립기상박물관-홍난파가옥)편이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