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일 입시 잔혹사와 '능력주의'라는 거짓말
우리는 긴 여행을 통해 세 가지 벽을 확인했다.
일본 청춘을 가로막은 '순응'의 벽. 미국 엘리트를 감싸 안은 '자본'의 벽. 그리고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는 '불신'의 벽.
솔직해지자. 이 벽들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가 아무리 분노하고 비판해도, 내일 아침이면 여전히 대치동 학원가는 붐빌 것이고, 강남 아파트값은 견고할 것이다.
개천은 이미 말랐고, 전설 속의 용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용이 되지 못한 우리는, 사다리를 오르지 못한 우리는 패배자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마지막으로 두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첫 번째 제안: '운(Luck)'을 인정하는 겸손함
마이클 샌델이 우리에게 던진 구명조끼는 바로 '운'이라는 단어다.
당신이 만약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사다리 위에 올라선 승리자라면, 기억하라. 그 자리는 오로지 당신의 노력 덕분이 아니다.
부모 잘 만난 운, 시대 잘 만난 운, 시험 당일 아프지 않았던 운이 당신을 그곳으로 밀어 올렸다.
그러니 아래를 내려다보며 으스대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 "나는 운이 좋았다"는 고백만이 당신의 오만함을 씻어줄 수 있다.
반대로 당신이 사다리 아래서 좌절하고 있다면, 기억하라. 그것은 온전히 당신의 탓이 아니다.
당신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운이 따르지 않았거나 룰이 불리했을 뿐이다. 그러니 자신을 학대하지 마라. 당신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불운했던 것뿐이다.
'운'을 인정할 때, 승자는 타인에게 관대해지고 패자는 자신에게 당당해진다.
이것이 우리가 서로를 혐오하지 않고 다시 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두 번째 제안: 수직의 용(龍)에서 수평의 꽃(花)으로
우리는 모두 하늘로 승천하는 '용'이 되고 싶어 했다.
용은 높은 곳에 있고, 화려하며, 권력을 가진 존재다. 하지만 모두가 용이 될 수는 없다. 하늘은 좁고 구름 위 자리는 한정되어 있다.
다시 처음의 애니메이션, <향기로운 꽃은 늠름하게 핀다>의 제목을 곱씹어 본다.
왜 작가는 '용'이 아니라 '꽃'을 이야기했을까? 그리고 왜 '늠름하게(Rin to Saku)' 핀다고 했을까?
꽃은 하늘로 날아오르지 않는다. 대신 땅에 뿌리를 박고 자기 자리에서 피어난다. 장미는 장미대로, 민들레는 민들레대로.
편차치가 70인 곳이든 30인 곳이든, 그곳이 비옥한 땅이든 시멘트 틈새든 상관없다. 꽃은 남을 짓밟고 올라가려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향기를 냄으로써 세상에 기여한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사다리 타기 실력이 아니라, 바로 이 '고유한 존엄성'이다.
의사가 되어 사람을 살리는 것도 훌륭하지만, 맛있는 빵을 구워 아침을 여는 것도, 깨끗하게 거리를 청소해 이
웃의 위생을 지키는 것도 똑같이 위대하고 늠름한 일이다.
사라진 용들을 위한 변명
이 글은 사라진 용들을 위한 변명이었다. 하지만 이제 결론을 바꿔야겠다.
이것은 용이 되기를 거부하고, 기꺼이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당신을 위한 응원가다.
더 이상 고장 난 사다리 앞에서 울지 말자.
대신 옆을 보자. 당신과 똑같이 상처 입고 서 있는 친구의 손을 잡자. 그리고 묻자.
"너는 몇 점짜리야?"가 아니라, "너는 어떤 향기를 가졌니?"라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숫자의 감옥에서 탈출해 진짜 내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비록 용이 되어 날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이 거친 땅 위에서, 그 누구보다 늠름하게 피어날 것이다.
지금까지 "사라진 '용'들을 위한 변명"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