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2.0 시대, 가치 동맹의 종말과 냉혹한 거래의 시작
북한 언급 '0회'가 의미하는 미국의 새로운 셈법
48페이지에 달하는 미국 백악관의 공식 문서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거기에 적힌 활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안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가 주는 서늘함이었다.
지난 11월 공개된 트럼프 행정부의 '2025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던 서울의 외교관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70년간 한미 동맹의 상수(Constant)이자, 미국의 안보 리스트 최상단을 차지했던 '북한(North Korea)'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7년 보고서에서 무려 17번이나 호명되며 "불량 국가"로 지목받았던 그 북한이, 2025년에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유령처럼 워싱턴의 레이더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 침묵을 두고 일각에서는 '전략적 인내'의 회귀라거나, 대화의 여지를 남긴 것이라는 순진한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이것은 오독(Misreading)이다. 외교 문서에서의 침묵은 여백이 아니다. 그것은 '우선순위에서의 배제'이자, 가장 냉혹한 형태의 '전략적 방기'다.
트럼프가 새로 그린 세계지도의 중심은 더 이상 유라시아의 분쟁 지역이 아니다. 그의 시선은 오직 텍사스 국경과 멕시코, 그리고 카리브해를 아우르는 '서반구(Western Hemisphere)'에 고정되어 있다. 그는 보고서를 통해 명확히 선언했다.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것은 태평양 건너의 핵미사일이 아니라, 국경을 넘어오는 이민자 행렬과 마약 카르텔이라고.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자임해 온 '세계 경찰'의 배지를 스스로 떼어냈음을 의미한다. 2026년의 미국은 민주주의 수호라는 거창한 명분을 위해 피를 흘리거나 달러를 쓰는 '아틀라스'가 되기를 거부했다. 대신, 철저히 국익이라는 계산기를 두드리는 '거래자'로 돌아왔다.
북한에 대한 침묵은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에게 묵직한 청구서를 내민다.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침묵한다는 것은, "관심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기존의 방식(동맹 방어)으로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겠다"는 최후통첩이기 때문이다. 즉, 북한 핵 문제는 이제 미국의 '핵심 이익'이 아닌 한국이 처리해야 할 '지역 문제'로 격하되었으며, 굳이 미국의 개입을 원한다면 그에 상응하는—아니, 그 이상의—현금(Full Price)을 내놓으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이제 한미 동맹은 '혈맹'이라는 낭만적인 수사를 벗어던지고, 넷플릭스 구독료처럼 매달 비용을 지불해야 서비스가 유지되는 '구독형 안보 모델'로 전환되었다. 가치(Value)로 묶인 동맹은 끝났다. 이익(Profit)으로 묶인 거래만이 남았을 뿐이다.
2026년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트럼프라는 거대한 해일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미국이 지켜줄 것"이라는 낡은 믿음을 붙들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여 '자유'를 사 올 것인가.
침묵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그 침묵 속에 담긴 청구서의 금액을 확인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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