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비싼 자산, ‘서사’와 ‘친절’
최근 주요 벤치마크에서 인공지능(AI)의 추론 능력이 인간의 IQ 140 수준을 넘어섰다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다. 퇴근도, 점심시간도 없이 3교대 근무를 수행하는 ‘저렴한 지능’의 범람이다. 과거에 고도의 지적 능력이라 상찬받던 것들은 이제 수도꼭지만 틀면 나오는 물처럼 흔해졌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한 갈증을 느낀다. 지능이 흔해진 폐허 위에서, 이제 가장 구하기 힘든 사치재는 알고리즘의 연산이 아니라 ‘진짜 인간이 개입했다는 책임의 흔적’이다.
우리는 '시대예보: 경량문명의 탄생'을 쓴 송길영 작가의 말처럼 ‘경량 문명’의 시대로 진입했다. AI라는 무기를 든 ‘개인’은 거대 조직과 맞먹는 역량을 갖게 되었고, 기업은 의사결정 단계를 극단적으로 줄이며 비대함을 걷어내고 있다. 이 민첩한 세계에서 조직은 더 이상 신입을 교육하지 않는다. 오직 ‘즉시 전력’이 가능한 경력자, 즉 이미 무언가를 삶으로 겪어낸 지혜를 가진 자만을 호명한다.
여기서 새로운 불평등이 발생한다. 이제 ‘경험’은 자본이자 계급이다. AI가 모든 프로세스를 담당하는 시대에 인간의 역할은 부품이 되는 것이 아니다. 기계의 효율 위에 ‘의미’를 설정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최종 관리자(Manager)’로 증강되는 것이다. 준비되지 못한 이들에게 경량 문명은 자유가 아닌 소외의 시작이다.
AI와 인간의 결정적 차이는 정보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AI는 데이터를 쌓아 올리지만(축적), 인간은 자신의 삶이라는 소화액으로 정보를 녹여 자기 것으로 만든다(소화).
연료와 양분: AI에게 데이터는 성능을 높이기 위한 ‘연료’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지식은 자아를 변화시키고 성숙하게 만드는 ‘양분’이다.
책임이 따르는 선택: AI의 끝에는 확률적 ‘추천’이 있지만, 인간의 끝에는 삶의 고통이 응축된 ‘선택(Will)’이 있다. AI는 유려한 문장을 흉내 낼 수 있지만, 그 문장이 초래할 결과에 대해 책임질 ‘자아’가 없다. 오직 인간만이 경험을 통과한 언어에 자신의 생을 걸고 방향타를 꺾을 수 있다.
지능이 저렴해질수록 상대가 ‘사람이길 바라는 영역’은 초고가 사치재가 된다. 우리는 AI가 생성한 완벽한 화음보다, 가수의 숨소리와 고뇌가 담긴 서사에 감동한다. 인간의 뇌는 정답이 아니라 ‘스토리’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또한, 관계가 프로젝트 단위로 짧아지는 경량 문명일수록 역설적으로 ‘다정함(Be Kind)’은 가장 강력한 비즈니스 프로토콜이 된다. 모든 것이 ‘호명’과 ‘평판’으로 결정되는 사회에서 다시 불려 나가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당신이 타인에게 ‘함께 일하고 싶은 인간’으로서의 신뢰를 풍기느냐에 달려 있다. 다정함은 이제 도덕적 미덕이 아니라, 실무적 생존 전략이다.
취업이 안 되는 시대, 이력서의 학벌과 자격증은 무력하다. 그것은 이미 AI가 대체한 ‘범용 지능의 영수증’일 뿐이다. 이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 냄새 나는 경험의 향기’를 풍기는 인간들이다.
지난 글에서 나는 국가의 주권이 중앙은행이 아닌 서버실로 옮겨갔음을 논했다. 하지만 그 서버실을 부리는 '주인의 자격'은 결국 인간에게서 나온다. 인프라는 주권의 기초일 뿐, 그 위에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다. 당신은 AI라는 포크레인을 손에 쥐고 어디를 파야 할지 아는 ‘지휘자’인가, 아니면 AI가 쏟아내는 매혹적인 콘텐츠에 중독된 ‘소비자’인가.
지능이 공짜가 된 시대, 당신의 유일한 자산은 알고리즘이 흉내 낼 수 없는 당신만의 무거운 서사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