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AI 그리고 달러 스테이블 코인
스위스 취리히의 한 프라이빗 뱅킹 룸. 모니터 속 헤드라인에 ‘이란, 호르무즈 해협 전면 봉쇄 검토’라는 속보가 뜨자 자산가들의 손이 바빠진다. 과거라면 금괴나 스위스 프랑을 찾았을 이들이 지금 누르는 버튼은 다르다. 그들의 자산은 순식간에 비트(Bit)로 변환되어 ‘달러 스테이블 코인’이라는 디지털 안전가옥으로 숨어든다.
전쟁의 불안을 유발한 당사자인 미국의 화폐 가치가, 그 전쟁이 만든 공포를 먹고 오히려 더 공고해지는 기묘한 연금술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공포는 자본을 이동시키고, 이동된 자본은 제국의 혈관을 채운다.
지정학적 불안은 제국에게 비극이 아니다. 전 세계 유동성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흡입기다.
강제된 디지털 이주: 물리적 국경이 닫히고 금융 제재가 시작될수록, 즉시 전송 가능하고 달러에 가치가 고정된 스테이블 코인의 몸값은 치솟는다.
리스크의 역설: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진 이들은 자국 화폐의 가치 하락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디지털 달러’의 포로가 되기를 자처한다.
불안이 깊어질수록, 달러의 지배력은 디지털의 옷을 입고 강화된다.
미국의 가장 아픈 발가락은 “누가 이 막대한 빚(국채)을 사줄 것인가”였다. 정치적 적대국인 중국이 미국 국채를 투매하며 패권을 흔들 때, 제국은 ‘스테이블 코인 발행사’라는 새로운 대리인을 전면에 내세웠다.
부채의 전이: 테더(Tether)나 서클(Circle) 같은 발행사들은 코인을 판 돈으로 반드시 미국 국채를 사야 한다.
개미의 방패: 중국이라는 거대 국가가 거부한 부채를, 전 세계의 이름 없는 개인들이 스테이블 코인을 구매함으로써 소액으로 쪼개어 대신 짊어지는 구조다.
미국이 달러를 무제한으로 찍어내도 시스템이 붕괴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인플레이션 압력을 전 세계 스테이블 코인 보유자들이 나눠서 감당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착취: 미국의 물가 상승 압력은 ‘디지털 빨대’를 통해 스테이블 코인을 사용하는 전 세계 사용자들의 지갑으로 분산된다.
영생하는 패권: 테더(USDT) 한 곳이 보유한 미국 국채 규모만 이미 독일이나 캐나다 같은 주요 국가의 보유량을 넘어섰다.
설계자들에게 전쟁은 자본을 세탁하고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는 환전소일 뿐이다. 숫자는 이미 대답하고 있다. 전쟁의 불꽃이 거세질수록 미국의 금고는 디지털의 옷을 입고 더 견고해지고 있다.
패배는 없었다. 다만 제국의 부채를 전 세계인의 스마트폰 속으로 잘게 쪼개어 옮겼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