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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cud Jun 07. 2016

|인상비평|
일베 조형물, 이후에 대한 소고 (1)

#1. 가설 제기 - 과연 우리의 '정상'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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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물은 파괴되었고, 사람들의 분노 아닌 짜증은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후에 사람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되려 반문할지도 모른다. 언제나처럼, 이후 사람들은 각자의 습으로 돌아가 같은 허물을 반복할 것이다. 사실, 나의 이어지는 무딘 비판이 효용이 없으리란 것은 잘 알고 있다. 발언의 시작은 모종의 책임 의식에서 출발한 것이었지만, 내 자신의 모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가르치려 든다는 것은 무척 부끄러운 일일게다. 그럼에도 발언을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일종의 자기 모멸이지 싶다. 내 안의 모순을 조금이라도 게워내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이 글을 마칠 때 쯤 나 자신이 조금이라도 달라지길 바라며 운을 떼본다.


* 최근 너도나도 한마디씩 거드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나, 반대로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글도 아마 그에 해당하겠지만, 나름 균형을 추구하며, 양자 모두에 전달될 수 있도록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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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부서져야 했을까? 먼저, 이 질문은 해당 작품의 공공 적절성 여부를 따지려는 게 아니다. 더욱이 예술가 한 개인의 의도를 시비하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다. 향간의 그러한 류의 비판은 실로 저급하다고 본다. 조금 비약하자면, 이런 식의 비판(난)은 반성을 유보시킨다. 이는 강남역 살인 사건과 관련해 ‘Misogyny(여성 혐오 혹은 대상화로 번역)로 볼 것이냐, 정신질환으로 볼 것이냐’, 또는 구의역 사건(사고와는 구별된다. 언론은 수정해야 한다.)에서의 ‘시스템의 문제냐 안전 불감증이냐’ 로도 전치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처럼 구조가 아닌, 개인으로 화살을 돌리는 것은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정지 혹은 퇴보할 것인가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프레임 상정의 문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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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어떤이는 개별 사건과 사회 구조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의아해 할 수 있다. 또 어떤이는 다른 세가지 사건들을 같은 선상에 놓고 볼 수 있는지, 반문할 수 도 있다. 부족하나마 설명을 이어 나가면 이렇다. 구조-무의식은 일상이란 지층 아래서 항상 꿀렁대고 있는 무언가를 말하는데, 평소에는 이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가, 지층을 때리는 사건에 의해 표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이 때 지층 아래에 박혀있던 가시는 일상의 혼란을 야기시키는데, 거의 모든 가시화된 문제(폭력)들은 이런 방식을 경유해서 드러난다. 다시 말해, 구조-무의식은 드러난 사건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 숨겨진 비밀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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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세 사건은 어떻게 한 데 묶을 수 있을까? 세 사건 모두, 우리 사회내 드러나지 않았던 병폐의 분출, 즉 일종의 사회-증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알리는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누구는 이를 폭탄에 비유하는데, 적절치 않아 보인다. 이들 사건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 사회 기저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오래 묵힌 상처처럼 작용하고 있다. 치유하지 않으면 한 번의 폭발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재발하게 될 것이다.(외면한다고 해서 결코 사라지거나 저절로 치유되지 않는다). 부족한 기술이지만, 강남역 사건과 구의역 사건에 대한 프레임이 왜 구조로 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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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일베 조형물에 대한 반응도 같은 맥락에서 다룰 수 있을까. 이에 답하기 위해, 나는 먼저 사람들의 반응에 주목해보았다. (그리고 이를 거울삼아, 스스로를 되돌아 보려 했다. 모든 사건은 내면의 거울로 삼기 

충분하다. 그렇기에 작가의 의도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관찰한 사람들 대부분은 일베 조형물에 대해 강한 불쾌를 드러냈다. 조형물을 향해 계란을 던졌고, 비방 포스트잇을 부착했다. 언론은 주변에 상주하며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했고, 결국 설치 이틀 만에 조각은 파괴되었다. 주동자는 자신의 행위가 익명의 광기로 해석되는 것에 강하게 반발하며 떳떳한 ‘범법자’이길 자처했다. (이 부분은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이다.-아래 계속.) 이 상징물이 도대체 무엇이었길래 사람들을 이토록 흥분시킨 것일까.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 보았다. 많은 사례를 종합하진 못했지만, 포스트잇에 적힌 내용과 SNS 게시글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학교 구성원으로써, 자의와 상관없이 주어진 불명예에 수치스러워 했고, 공공에 불쾌감을 주는 작업이었다는 점에서, 작가의 도덕성을 비난했다. 함께, 설치 및 장소 선정의 방식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더불어 표현의 자유 논란은 이번에도 역시 빠지지 않았다. 난 이 기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찾고 싶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또다른 혐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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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대상은 대개 시야 밖에 존재하는데, 혐오의 대상이 표층으로 드러나면 제거해야할 적으로 상정된다. 혐오로 접근하기 위해, 나는 여기서 ‘더러움’ 개념을 설명한 문화 인류학자 더글러스의 시선을 참고하기로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더러움’ 은 ‘제자리에서 벗어난 것' 이다. 밥알이 입 안이나 밥 그릇에 있으면 괜찮지만, 식탁이나 옷에 묻으면 ‘지저분한-더러운’ 대상으로 느껴지는 게 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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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더러움' 은 '두려움' 과도 밀접한 지점을 갖는데, 제자리에서 벗어난 대상이 자신을 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두려움을 불러온다. 감옥에 수감되어 있어야 할 강력범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충분히 두렵게 만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들려서는 안될, 소리의 원인이 주변에 있지 않은 소리는 우리를 오싹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그 대상을 제거, 격리함으로써 안정을 되찾으려 한다. 이처럼 혐오는 자신에 대한 방어기제로서 발현되는데, 이런 혐오의 예는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는 동성애에 대한 혐오가 그득한데, 사실 이 혐오는 두려움에 기반한다.-아래 다시) 다시 말해, 혐오를 억압한다는 것은, 사실 그 대상에 강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걸 반증한다. (IS의 테러도 서구연방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란 말은 사실 같은 감정을 은폐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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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위의 개념들에 대한 설명이 충분치 못하지만, 이를 종합해, 소박한 나의 관점으로 혐오를 도식화 해본다면, 혐오의 감정은 결국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 있는 대상을 향한다. 다시 말해, 낯선-두려운 대상, 우리의 ‘정상 질서’를 뒤흔드는 대상이 혐오를 덮어쓰게 된다는 말인데, 이 때 우리는 이질적인 혐오의 대상을 우리와 분리시켜 놓으려는 충동을 경험하게 되며, 이를 실천으로 옮겨 격리시킨 장소가 감옥, 정신병자 수용소, (병원, 군대) 이었다는 식의 인상 설정도 가능해 보인다. (이런 식의 접근은 ‘소수자 혐오’, ‘인디언 거주 구역’등에도 적용시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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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접근이라 따져봐야할 지점들이 아주 많겠지만, 상기의 논의들을 프레임 삼아, 이번 사건을 해석해 본다면. ‘일베’는 우리의 면역을 강하게 발동시키는, 표층으로 드러나선 안되는 집단이었고, 이를 가시화한 상징-조형물은 ‘있지 말아야 할 곳' 에 있는 ‘있어선 안될’ 대상이었기에, 다중의 혐오를 불러온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비-정상적인’ 조각을 파괴시킨 주동자는 스스로 ‘정상 질서’를 회복한 인물로써 당당함을 유지 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 해볼 수 있다.(사실, 주동자(랩퍼 성큰)는 '정상성' 개념을 이용해 자기 실리를 챙긴 케이스로, 포퓰리즘 영합으로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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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를 표현의 자유 논란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정상성’ 이란 개념은 이데올로기와 접하는 지점들이 많이 있다. (어쩌면 '정상성'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이 논쟁의 핵심에 위치한,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는 주장은 그 동안 귀가 따갑도록 들은 경구 중 하나이다. 이는 우리에게 제한된 자유만이 주어 졌음을 시사하는데,  ‘정상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의 자유는 얼마든지 보장되지만, 이를 벗어나게 될 경우에는 격리 될 각오를 하라는, 모종의 이데올로기적 협박으로도 읽힐 수 있다. 선택의 자유는 있지만, '올바른' 선택을 한다는 조건 아래서만, 그 자유를 행사 할 수 있다. (사회적 금기를 추적하다 보면 '정상성’ 의 지평 절벽을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 ‘정상성’은 일련의 드러난 사건들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하며, 각 사건은 '(지배적인 권력의) 정상성’에 대한 충성도를 테스트하는 리트머스지로 활용된다. (이런 식의 금기의 대표로, 종북 프레임-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사람은 모두 빨갱이다.'- 이 있으며, 조금 더 밀고 나가면, 사회적 광기로 읽히는 파시즘, 혹은 매카시즘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정치적 수사에서도 이러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는 페미니즘 담론에서 조차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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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이 일반화된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 논란은  '타자에 대한 존중' 과 '(우리쪽의) 표현의 자유' 로 대결 구도를 형성한다. 사실 이들간의 소모적 논쟁은 모종의 연극으로 볼 수 있다. 대결의 양자는 서로를 기준 삼아, 각자의 입지를 굳건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여기에는 양자간의 은밀한 공모가 숨어 있는데,  무제한적인 관용의 한계와 대면할 때, 대결 구도는 극으로 치닫는다. 여기에는 양자가 서로에 느끼는 두려움이 바탕한다. (혐오를 혐오한다는 식) 대개의 이러한 논쟁은 한쪽에 대한 정죄로 종결된다. 다시 말해, 각자의 '정상성' 의 침해에 대한 방어기제인 셈이다. 그렇다면 신념을 위한 투쟁은 당연한 수순일까? 여기에서 근본주의와 유사-근본주의의 차이가 드러난다. 흔히, 근본주의를 말할 때, 광신도를 떠올리는데, 사실 이들은 유사-근본주의자들이다. 티벳 불교의 근본주의자나, 프란치스코 교황과 같은 이들은 타 종교에 대해 정죄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신념을 지켜나간다. 그들에겐 자신들을 향하는 혐오조차도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한국 기독교의 동성애 혐오는 유사 근본주의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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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일베 조형물에 대한 다중의 혐오에 대해 중간 점검을 하기로 하자.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일베 조형물에 대한 다중의 혐오는 두려움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소수자 혐오와 민주화 부정이라는 '정상성'에 대한 위협, 그들이 언제 길거리로 뛰쳐나와, 테러리스트로 변할지 모른다는 불안은 일베에 대한 혐오를 조성한다. 이에, 일베는 퇴치 되어야하는, 억압 되어야하는 대상으로 설정되는데, 이는 역으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체계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정상성'에 대한 신념이 부족하다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더 큰 위험은,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다보면, 드러나는 사건들 하나 하나에 공포를 느끼게 되는데, 이런식의 두려움은 새로운 유사-근본주의의 도래를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보다 확고한 근본주의자가 되어야하며, 위협이 되는 대상에 마저도 관용을 취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만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혐오를 조장하는 이들마저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며, 이들에 대해 엄정한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한다."(혐오마저 관용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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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에 의문이 하나 더 따라 붙는다. 우리는 어떻게 그 '정상성' 을 수용하게 되었을까? 여기에 접근하기 위해서, 초보적이지만, 아브젝트 미술 담론의 주를 이루는, 크리스테바의 아브젝시옹 개념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혐오를 발생시키는 원 감정으로 수치를 언급하는데, 수치는 자신의 내면에 대한 외적 억압으로 인해 발생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수치가 반복되면 비참한 정서를 느끼게 되고, 이 비참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사람을 찾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권력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된다는게 아브젝시옹 개념을 이루는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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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함을 느낀 주체가 자발적으로 권력에 복종한 지점에 대해, (위험하지만) 나는 이것을 ‘정상성’ 개념으로의 자발적 편입으로 이해한다. 즉 가시화된 권력 집단뿐만 아니라, 좀 더 포괄적으로는 통념적인 사회 구조로의 편입을 말한다. 이번엔 좀 더 쉽고 가까운 예를 찾고자 한다. 서점의 가판을 장식하고 있는, ‘나이대별 해야할 목록’ 따위의 책들에선 이러한 증상들이 드러나는데, 취직, 결혼 적령기 와 같이 비교적 느슨한(?) 아웃라인은 암묵적이지만, 분명 실재하고 있는 ‘정상성’ 이다. 취직, 결혼 연령이 늦어지면, 압박이 따르고, 당사자와 주변인은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물론 직접적인 압박이 없어도 충분히 수치를 느낄 수 있다.) 수치는 반복되어 비관에 이르고, 결국 히스테리로 발전한다.(조금 순진해보이지만, 이와 유사한 사례들은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은 이 과정에서 발생되는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고, ‘정상적인’ 삶의 궤도로 안착되길 희망한다. 이런 ‘정상성’의 압박은 사회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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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의의 연장에서, 일베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도 짧게나마 시도해볼 만하다. 일베 회원들은 스스로를 비하하는 놀이로써 자신들을 벌레라 부르는데, 이들의 발언에선 (정상성의 억압에 의한)자기-혐오가 느껴진다. 실제로 일베는 청년 세대 위기 담론이 형성될 즈음 형성된 집단이었다. (또 다시 거친 가정이겠지만 계속해서 밀어부쳐본다.) 일베는 자신의 나이대에 맞는 ‘정상성’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고, 수치와 비참을 경험한 그들이 자기-혐오의 넘치는 부정을 해소할 창구로 찾은 것이 바로 ‘정상성’에 대한 공격이었다는 식이면, 그들의 (정상에 비춰)‘비-정상적인’ 행위들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기존 가부장적-군사독재 정권의 권력으로 숨어들어 간 것 역시, 자신들의 비참함에 대한 자발적 복종으로 읽을 수 있다. 물론 넷net이라는 가상 공간이 주 활동 무대라는 점,  1-30대 젊은 남성이 주라는 특수성이 더해져 일베만의 히스테리를 구성했다 손 치더라도, 결국 그들의 '비정상적인' 행동의 주된 동기를 ‘정상성의 억압’ 에서 찾는건 그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여기에 조금 삐딱한 시선을 더하면, 일베는 기실 ‘정상성’이 낳은 괴물이며, 일베는 어디에도 있다라는 식의 주장은 이전보다 더 무겁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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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를 좀 더 진전시켜, 일베가 정말 '정상성' 에 대한 실재적 위협이 될 수 있을까?  사실 이들의 '정상성'에 대한 공격은 히스테리로 봄이 옳다. 이들 자체를 IS와 같은 유사-근본주의로 바라보는 것은 과한 해석이다. 다만, 이들이 정치 권력에 의해 이용될 때에 이들은 얼마든지 유사-근본주의로 돌변할 수 있다. 이 지점을 유의한다면, 일베 현상은 우리 사회의 거울로 삼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렇기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따를 것이다. 그들을 수치스럽게 한 우리의 '정상성' 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그 '정상성'의 실체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행동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정상성'은 진정 진리인가? 모순은 없는가? 또 우리에겐 저들을 억압할 근거가 충분한가, 그리고 저들을 억압하고 제거하는 것이 분쟁의 해결이 될 수 있을까?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정상성' 은 얼마나 보편적인가? 보편적이란 말은 진정 유효한가?

(이에 조심스럽게 구체적인 의문을 형성하자면, 몇년 전 학교 청소 노동자 사건에 침묵했던 것과 이번 일베 조형물 설치 논란 중, 어느 쪽이 더 불명예한 것인지 좀 더 따져보기로 했다. 이를 추궁해 가다보면, 소위 ‘명예’ 라는 개념을 뒷받침하는 ‘정상성’ 의 너저분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7)

위 질문을 받아, 나는 조금 위험한 발언으로 '#1 가설 제기' 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일베를 공격하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현재의 '정상성'을 유지시키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정상성의 억압으로 태어난)새로운 일베를 기다리는 꼴이 될 것이다. 드러난 폭력보다, 더 위험한 것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것처럼 보이는) 사회가 행사하는 폭력이란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두려워하는(혐오하는) 이유가 진정 '저것' 때문인지에 대해서도 숙고해 보아야할 문제일 것이다. 끝으로, 글을 시작하면서 끝내기까지, 많은 생각의 정리가 있었으며, 나름의 해결 모델을 발견한 것은 큰 수확이라 생각한다. 다음 소고, <#2. 모델 탐색> 에서는 간디와 함석헌 선생과 같은 비폭력주의자들의 논의를 참고할 예정이다. 이들은 사실상, 겉으로는 비폭력주의자들이었지만, 체제를 전복하려했다는 점에선 가장 폭력적인 인물로 그려져야만 한다. 



* 덧붙이자면, 예술이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가? 란 식의 논의가 제기된 적이 있었다. 그 때에 방식이란 것이, 과거의 기억을 지속해서 표면으로 끄집어 올리는 일종의 꿈-투사 작업과도 같았는데, 결국 이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느냐 안되느냐의 문제는 상담가보다,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당사자의 역할이 중요했다. 


** 소고 (2)에서는 아마 (1)에서 충분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보충과 오류 수정에 대한 변론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그리고 실천 모델에 대한 탐구가 될 것이다. (1)은 괴장히 주관적이었다면 (2)는 좀 더 객관적 서술로 채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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