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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cud Oct 30. 2023

하고싶은 것과 해야하는 것

운명에 대하여(3)

2. 

  하고싶은 것을 하는 것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는 환상에 가깝다. 갖고싶은 것을 갖는 것은 욕구는 채워 줄 지언정 근원적 만족을 줄 수 없다. 그럼에도 현재의 불만족의 원인을 하고싶은 것, 되고싶은 것, 갖고싶은 것의 부재 탓으로 돌린다.


해야만하는 것

  행위 동력은 여러 차원으로 구분되어 있다. 가장 낮은 단계가 해야만하는 것이다. 이는 철저히 수동적 동력으로 기계적 동기에 불과하다. 해야만하는 것은 불가항적이며 기계적 명령을 따른다. 때로 이것은 자연 자체로 읽힐 수 있는데, 생존을 영위하기 위한 노동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실 노동이 신성성을 획득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역사다. 오래 전부터 노동은 죄에 대한 벌, 비천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노동 계급의 득세로 인한 정치적 수사로서 신성성이 부여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집단 무의식에는 노동에 대한 천시가 깔려 있다. 노동하지 않는자 먹지도 말라는 격구는 정확히 빈곤층을 타깃하고 있다. 노동하지 않는 부자들의 노동 부재는 철저히 묵인된다는 점에서, 노동에 대한 인식적 모순이 적나라게 발현된다. 노동-신성성이 사실 노동할 수 밖에 없는 굴종에 대한 복수라면 어쩔텐가? 



하고싶은 것


  그 다음 차원은 하고싶은 것을 하는 단계이다. 하고 싶은 것은 대상A가 있어야 한다. 즉, 욕망을 동력으로 삼으며 자의적 동기라 착각하기 쉽다. 하고싶은 것은 순수 자발적이며 소망-꿈과 연결되어 스스로가 명령을 내리는 구조로 읽히기 쉽다. 하지만 순수 욕망이란 없는 것이며, 욕망토록 요구된 것이라면, 자유의지가 만약 꼭두각시 인형의 춤사위라면 어쩔텐가? 


  뇌과학의 여러 발견들은 자유의지 이전의 뇌 화학작용이 있음을 말한다. 놀라운 인공지능의 발전은 우리의 상상계와 상징계의 발현에 의문을 남긴다. 욕망은 정교하게 설계되어 그것이, 자아가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도록 만들어, 행동하도록 하지만, 욕망을 스스로 다스릴 수 없다는 데, 그것의 시발이 자아에 있지 않다는 것은 명확하다.  하고 싶다. 되고 싶다. 갖고 싶다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종국엔 텅 빈 타자가 주문을 왼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고싶은 것을 한다는 것은 욕망의 노예로 살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해야하는 것 


  그렇다면 우리가 다음으로 발견해야 하는 차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해야하는 것의 단계이다. 이는 노동과 구분되는 작업의 영역이며, 욕망과 구분되는 의지의 영역이다. 해야하는 것을 한다는 것의 시작은 자신을 아는 것으로 부터 비롯된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스스로 객관으로 관찰할 수 있음을 의미하고, 원과 욕망을 구분할 줄 알며, 노동과 다른 작업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만으로 행위 동력을 갖출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해야하는 것은 자신의 역할을 인지하는데 있다. 그 역할은 신이, 혹은 시대가, 혹은 운명이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부름에 응답한 이들은 무한 동력을 갖는다. 그 뿌리가 무한 양분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목숨마저도 소명으로 바칠 수 있다. 부름에 응답한 이들은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 명확히 알 고 있다. 욕망에 이끌리지도, 타인의 인정에 기대지도 않으며, 묵묵히 자신의 할일을 수행한다. 그들의 삶의 이야기는 고결하다. 그들은 무엇이 진실인지를 알며, 그렇기에 무엇을 해야하는지 똑똑히 알고 있다. 그들은 해야만하는 것이나 하고싶은 것이라는 함정에 빠지는 것을 주의할 줄 안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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