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 인천공항
“아무튼간 충분히 머리 식히고 다시 복직할 생각 해라.”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생각해볼게요.”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며 건조한 대답을 뱉었다. 부자는 말이 없었다. 차 안에는 두 사람의 무수한 말줄임표들이 가득 메웠다. 어쩐지 숨이 막혀 창문을 내렸다. 건물들이 슥슥 소리를 내며 지나친다.
나는 지금 산티아고로 도망치는 중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스페인에 있는 전세계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길 중 하나다.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 성인의 선교 루트를 따라 걸어서 그가 잠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까지 꼬박 한 달 정도를 걷는 여정이다.
그 시작은 성지 순례의 의미였겠으나, 요즘에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인생의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한 달이라는 긴 시간동안 인생을 돌아보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는 자기 수행으로 이 순례길을 걷는다.
누군가 말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떠나야 한다고. 내가 지금 그랬다. 내 인생 재부팅이 절실했다. 망가진 인생을 피해 도망칠 곳이 필요했다.
올해 초 나는 주체적인 삶을 살겠다며 삼 년 다닌 회사를 돌연 휴직했다.
어렵게 들어간 대기업에서 부모님은 정착을 바라셨다. 휴직이란 건 일종의 타협이었다. 이 기간 동안 세상에 내 인생을 증명해보이고 일 년 뒤 당당히 퇴사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해의 반이 되도록 증명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호기롭게 시작한 스타트업은 동업자와의 갈등으로 하차하고, 내 책을 내겠다는 계획도 게으른 핑계 속에 무기한 연기되고 있다. 그 와중에 함께 미래를 그리던 여자친구와 이별했으며, 몸무게는 세 자리를 찍었고, 통장 잔고도 바닥에 다다랐다.
아… 한 가지 증명되려 하고 있다. 어쩌면 나는 주체성이 전혀 없다는 것. 시스템을 잃은 나는 맥없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복직을 말씀하시는 것은 누가 봐도 합리적인 조언이었다.
출국날 하늘이 정말 우중충하다. 차라리 한바탕 쏟아졌다면 시원했을텐데. “다녀올게요. 건강히 계세요.” 귀양 가는 선비 얼굴을 하고 문안 인사를 올렸다. 해외여행이 이토록 우울할 수도 있구나.
하기사 일반적으로는 고생한 자신에 대한 보상으로 해외여행을 떠난다. 뭘 잘했다고 도피성 여행이 설레겠는가.
그러나 언젠가 나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꿈꾸며 마구 가슴 설레던 때가 있었다. 그 여행길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내 인생이 얼마나 멋진지 이야기하며 미지의 당신들의 멋짐에 대해서도 마음껏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도무지 자랑할 것이 없는 지금 내 모습에 출발 전부터 기가 죽었다.
저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씨꺼먼 옷으로 위아래 맞춰입고, 한 달 째 방치한 수염이 덥수룩했다. 우울한 낯짝이 더해지니, 형색은 ‘순례자’보다는 ‘방랑자’가 어울렸다.
그렇네. 숭고함과 기쁨이 없는 수행은 아무리 성스러운 길이라도 순례가 될 수 없구나.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게 이 뜻인가 보다.
비행기 시간이 다가오자 정말 복잡한 마음이 되었다.
그저 어떻게든 지금보다는 낫겠지. 그런 마음으로 급하게 정한 여행이었다. 이 상태를 더 방치했다간 내가 정말 싫어질 것 같아서, 더 오래 고민했다간 이 여행에 거는 기대만 더 커질 것만 같아서.
그러나 결국엔 그런 감정들도 출발 직전 급하게 오는 바람에 한꺼번에 혼란스러워졌다. 나 진짜 가는 건가? 내가 이걸 가는게 맞나? 차분히 생각해보려 해봤자 이제 너무 늦었다.
실감도, 상상도, 계산도 전혀 되지 않는 얼얼한 기분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그래 뭐 어떻게든 되겠지… 이륙도 전에 마취된 것처럼 잠에 빠졌다.
D-3 대한민국, 인천
- 9,990 / 779 km
0 / 213개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