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내가 쓴 책을 읽어보다가 내가 인용했던 문구를 만났다.
“사십 대에는 좀 넉넉한 시간의 옷이 필요한 것 같다. 빈틈없이 날카로운 잣대는 늘어진 뱃살 드러나는 쫄티처럼 이제 내게 안 어울린다. 갑갑하고 각박하다. 남 보기에도 안 좋고 나도 불편하다. 야무지게 살려니 체력이 달린다. 오래된 핸드폰처럼 일 하나 처리하면 어느새 배터리가 한 칸만 남는다. 아무래도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야 할 때인가 보다. 게으름을 지혜의 알리바이로 삼지는 말되 게으름이 아닌 느긋함으로, 조급함이 아닌 경쾌함으로, 주변의 것들과 어우러지는 행복한 삶의 속도를 만들어나가야겠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내려올 때 볼 수 있도록.”
은유의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에 나오는 말이었는데 이 문장을 인용할 때만 해도 마흔이 되기 전이었다. 그런데 진짜로 마흔이 되고 나서 읽으니 이렇게 와 닿을 수가. 일 하나 처리하면 방전 상태가 되는 체력에 쫄티 따위는 이제 입지 않는 모습도.
얼마 전부터 효소와 콜라겐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있다. 그런데 루테인은 늘 옆에 세워만 두고 자꾸 까먹어서 큰일이다. 어젯밤에는 변기에 앉았는데 2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뭔가가 꾸물대는 것 같아 벌레인 줄 알고 혼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가가 자세히 보니 그냥 먼지 같은 게 나뒹구는 거였는데 아... 이제부터 루테인을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겠다.
글도 그렇다. 요즘 브랜딩에 관심이 많아 브랜딩형 인간으로 좀 살아보려고 이런저런 시도도 하고 글도 써보려고 하니 잘 안 써졌다.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간 나머지 창조의 기쁨을 잠시 잊고 이래저래 욕심을 부렸나 보다. 예전에 읽었던 장강명의 <책 한 번 써봅시다>를 다시 펼쳐보니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며 자신을 좀 더 믿어보라는 얘기가 와 닿았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뛰어난 사업가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사업을 하면 안 되는 걸까? 중요한 건 '뛰어난 사업가가 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이 사업으로 내가 무엇을 얻을까'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지난주에 생긴 것이 아니라면, 몇 년 된 것이라면,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써야 하는 사람이다. '의미의 우주'에 한 발 들였고, 그 우주에 자신의 의미를 보태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내가 뭐 대단한 글을 쓰려는 것도 아닌데, 아니 처음에는 뭔가 대단한 글을 써보려고 욕심냈다가 내가 토해낸 글들이 내 머릿속 생각과는 너무 다르게 형편없음에 지레 겁먹고 포기했다는 게 맞을 거다. 장강명 작가는 그런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거라고 말했지만 그 과정을 겪고 나니 몸살을 앓은 것처럼 힘이 쭉 빠져버렸다.
가식이 끼어든 글을 들키기 마련이라며 인용 욕심과 감동에 집착하지 말라는 그의 말에 정신이 버쩍 들었다. 정직하게 잘 쓴 글은, 거기서 묘사하고 있는 사건뿐 아니라 그 글을 쓸 때 작가의 자세도 독자에게 보여준다고. 내면의 고통과 혼란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한 인간의 모습은 늘 아름답고 감동적이라 어떤 미사여구도 거기에는 못 미친다고.
그의 말을 정수리에 얹고 그동안 쓴 글을 과감히 다 버린 뒤 아예 다시 시작해 보았다. 누군가의 스타일을 닮아보려고 억지 상념들로 이어 붙인 추상적인 글이 아니라 담백하고 구체적으로 글을 시작하니 내가 봐도 훨씬 나았다. 앞으로도 여러 번의 고비가 찾아오겠지만 뇌의 근육을 키우고 내 삶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성찰하는 한 괜찮을 것이다. 이제 내 글의 느끼함이나 알맹이 없음을 나 스스로 알아챌 수 있으니 됐다.
누가 쓰라고 등 떠미는 것도 아닌데 혼자서 글을 쓰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걸 봐서 나는 써야 하는 사람인가 보다. 그렇담 계속 쓰는 수밖에. 다만 방전되지 않도록 배터리를 잘 충전해가면 쓰겠다. 아무래도 오래도록 쓰는 사람으로 살 것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