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산다
대학 조별과제가 팀원의 부재와 미완성의 미학을 경험하게 했다면
회사의 협업은 바뀌는 팀원, 서로 다른 수준과 이해도, 다양한 직급과 책임이
거대하게 맞물리는 복합적인 톱니바퀴의 집합이다.
대학 조별과제는 시간만 잃지만 회사는 그 시간도 돈이다.
마케팅 비용, 외주 계약 등 눈에 보이는 금액은 물론이고 거기에 투입된 인적 리소스 자체도 비용이다.
여러 가지 업무가 동시다발적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 일로 인해 밀린
다른 프로젝트의 기회비용까지 함께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다.
비용이 소요된다고 할 때, 그 비용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재정의가 필요하다.
알앤알(R&R: Roles And Responsibilities)
역할과 책임을 나누는 부분이며 내 경력 주요 포트폴리오가 되기에 신중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할당된 역할에 대한 방어 전략이다.
크로스 체크, 히스토리 공유, 모니터링, 지속적인 업무 요청 등
책임이 돌아올 때를 대비한 근거 자료들로 방어진을 미리 세워둔다.
나 혼자 R&R의 첫 번째 우선순위다.
실제로 성과가 있다, 없다를 떠나서 이제부터는 '증명'해야 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결과치가 나온 원인을 파악하고, 그에 따른 근거 자료인 통계와 보고서 지옥이 시작된다.
앞으로 유사한 업무를 진행할 가능성을 측정할 수 있는 일종의 판례와도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어차피 보고 판단하는 것은 사람이기에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공작새가 한껏 깃을 세우듯 부풀려 흔들어댄다.
최고로 예쁜 포장지를 고르고 이런저런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여 꾸며본다.
요즘 시대에 '적'이라는 말이 낯설 수 있지만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고,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옛말들이 눈앞에 살아 숨 쉬는 곳.
갑과 을은 지칭 명사일 뿐 을의 비위를 건드릴까 눈치 보는 갑도 있고
이미 계약은 되었으니 나 이 정도만 합니다~ 하는 배 째라 을도 있다.
프로젝트 종료까지 넘실대는 시소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펼쳐지는 기싸움으로
승자를 명확히 알 수 없는 묘한 전투가 끝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여기서 승기를 잡지 못한다면 상황은 똑같을지라도
그들이 업무 이해도가 낮거나 비협조적인 것이 아니고
그들을 설득하지 못한, 이해시키지 못한 우리 잘못이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나의 의견이나 옳고 그름보다는
의사결정이 되었는지, 그 내용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하다.
결정이 되면 그저 수행해야 하는 것이 대부분의 역할이기 때문에
판단을 내리는 리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고, 팀장의 역할 비중 자체가 업무상 선점 효과가 높다.
즉, 팀장이 못났을 때 나를 비롯해 팀 전체가 싸잡아 얕보인다는 얘기다.
윗사람 나오라 그래! 라고 하는 진상 손님 짓은 어디든 다 있고 통하는 법이다.
그때 팀장이 웃으며 공수표 날리면 뒷수습은 나의 몫이다.
실무는 내가 하지만 생색내기는 팀장이 하는 형태로, 팀 안에서 R&R이 나뉜다.
그러나 그 공로는 팀이 낸 것이기에, 팀장의 성과다.
거기서 거기다라는 말은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유관부서라는 이름으로 내 주위를 항상 맴돌고 있는 그 팀, 그 사람들.
외주 업체 또한 선정부터 환경을 세팅하고 실무진끼리 손발 맞춰가는 시간들도 모두 리소스이기에
한번 파악이 되었다면 치명적으로 못해먹겠다 수준이 아니면 그냥 고(go)다.
프로젝트는 바뀌더라도 그 밥에 그 나물로 또 우리끼리 모여 머리를 맞대본다.
퇴사라는 극단적인 선택이 있지 않고서야 벗어날 수는 없다.
웬만하면 좋게 좋게.. 근데 그 좋게 좋게의 혜택 나도 좀 보자.
차라리 나 혼자서라도 다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할 텐데.
회사라는 곳은 부탁, 요청, 전달해야 하는 많은 부서가 얽혀있다.
정해진 시간 속에 눈치 게임처럼 앞에서 시간을 써버리면 나머지 뒷 타임이 독박 쓴다.
내가 하고 싶어서 요청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리 빌빌 빌어야 되는지 모르겠다.
협업의 다른 말은 '우리 함께'가 아니라 '나 대신 너'인가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을 통해 성장할 것이라는 희망,
적어도 그렇게라도 믿어야 한다는 믿음.
퇴사라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기 전까지는 나의 역할을 해야지.
그 모든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소중한 톱니바퀴 기능을 해야겠다.
내가 믿을 것은 나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