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편집숍 아이템 07] 산만함 콜라주
“한 가지에 집중하세요.”
많은 자기계발서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멀티태스킹 하지 마라, 한 우물을 파라, 집중력이 성공의 열쇠다. 물론 나보다 훨씬 더 사회적으로 성취한 분들의 이야기지만, 어쩐지 이들의 이야기는 내게는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아니, 더 솔직히 이야기하면 요즘 세상엔 잘 맞지 않는 논리 같다.
내 컴퓨터 화면엔 늘 창이 5개 이상 열려있다. 작업 중인 문서, 참고할 잡지기사, 영감을 주는 영상 혹은 이미지, 그리고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유튜브창 등. 나는 그렇게 한 가지만 하는 게 아니라, 늘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한다. 아니, 그래야 마음이 푹 놓인다.
언젠가 남편이 내 컴퓨터를 보며 “지금 노는 거야? 일 하는 거야?” 살짝 비꼬듯 물은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에 대한 답을 선뜻 내어놓지 못했다. 왜냐? 난 지금 '놀기도 하고, 일도 하는' 멀티 플레이어 상태니까. 노는 것과 일을 그만큼 따로따로 분리하지 못하니까.
가령 난 연예기사를 깔깔대며 읽다가도, 어느 잡지 속 모델의 무심한 얼굴과 마주치면 '퍼뜩' 뭔가가 떠오른다. '뭐지? 이 완벽한 콘트라스트는?' 그렇게 '특정 순간'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창조되면 서둘러 메모를 적는다. 그리고 그렇게 아이디어 하나를 쟁여놓는다.
책을 볼 때도 늘 침대에 여러 권 펼쳐놓는다. 그러면 책 속 줄글 중, A키워드와 B키워드가 유독 겹쳐 보이는 날이 있는데, 그러면 곰곰이 그 부분을 바라보다 'A x B 키워드'로 새로운 컨셉이 만들지기도 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아, 내가 이렇게 해야지!" 딱히 의도한 건 아니다. 그냥 멀티로 놀다 보니, 일이 만들어지는 거다.
그래서 내 작업 방식은, 결코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한다. 오히려 산만하고, 정신없고, 무엇보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런데 이게 진짜 문제이고 잘못된 것일까?
사실 창의성의 역사를 살펴보면, 오히려 '굉장한 산만함'이 혁신을 만든 경우가 더 많다. 한 가지만 우직하게 판 사람이 아닌, 여기저기 늘 기웃거린 사람들이 세상을 바꿨다는 말.
그 증거? 여기 1967년 비틀즈가 만든 앨범 하나로, 그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1967년 6월 1일. 비틀즈는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라는 앨범을 발매했다.
앨범을 낸 이유는 간단했다. 인기는 하늘을 치솟았지만, 보이밴드의 한계를 뛰어넘고 싶었던 그들은, 오랜 휴식기를 거쳐 스스로를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라는 새로운 페르소나로 지칭하며 앨범을 낸다.
그리고 실제 이 앨범이 발매되자마자 '비틀즈'에 대한 평가는 완벽히 우상향 한다. 그들은 '흔한 아이돌'이 아닌 '혁신적 아티스트'로 성장했고,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1-3위에 늘 꼽히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이 앨범을 듣다 보면, 살짝 이상하다. “뭐야? 이게 왜 위대하지? 도대체 음악 장르부터 알 수가 없잖아?”
실제 앨범 속 음악들은 확실히 친숙하지 않다. 록 음악인가 싶다가 갑자기 오케스트라가 나오고, 오케스트라가 나오다 또다시 서커스 음악 혹은 클래식이 흐른다. 응? 이거 뭐야?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어느덧 앨범의 사운드 트랙은 이미 끝이 나 있다.
특히 조지 해리슨이 작곡한 “Within You Without You”에선, 인도 악기 시타르의 이국적인 전주가 흐르는데, 그 '징징하는' 음률이 귀에 꽂히는 순간 당신은 착각의 늪에 빠질지도 모른다. “뭐야, 이거 인도의 명상음악 아니야?”
하지만 비틀즈가 위대해진 이유는 이런 '장르에 대한 비판 혹은 한계'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령 영국 팝 음악에 인도의 음악을 접목한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말도 안 되는 '파격적 발상'이었는데, 비틀즈는 '우리가 좋으면 그만'이란 생각으로 그냥 밀어붙였다.
그래서 앨범 커버 역시 그 유명한 '콜라주 이미지'다. 말론 브란도, 마릴린 먼로, 밥 딜런, 애드거 앨런 포 등. 시대를 초월한 배우, 가수, 작가 등이 '새로운 밴드의 이름'으로 한데 모여있다. 통일성? 딱히 없다. 굳이 핵심을 찾으라면,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들, 그냥 비틀즈 멤버들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아 놓았을 뿐.
하지만 더 대단한 건, 이 음악이 '단지 믹스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실제 앨범을 만드는 데 걸린 시간만 장장 700시간. (당시로선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바로 그들이 '끝없이 음악을 듣고, 실험하고, 가장 적절한 배합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시도하고-섞고-버리고-다시 섞는 최적의 창조적 배합을.
그렇게 비틀즈는 한 가지에 집중하지 않았고, 다양한 장르를 섭렵해 그들만의 '완벽한 변신점'을 찾아냈다. 어쩌면 비틀즈에게 최악의 조언은 이것이었을지도.
“저기요. 그냥 하던 거나 하세요!”
요즘 같은 시대에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를 다시 떠올린 이유는, 우리가 실제 '다양한 것을 섞어야 살아남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AI로 비유하면 GPT, 클로드, 미드저니, 수노, 하일루오 등을 다 섞어내야 하는 식인데. 부연하자면, 한 가지만 잘하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복잡해 보이는 것을 조화롭게 '믹스하는' 디렉터의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디렉터'라는 말이 꽤 거창해 보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굉장히 진솔한 말이다. '디렉터'의 진짜 의미는 '쓸모 없는 보이는 것들'까지 '나만의 쓸모로 새롭게 조화시키는' 애정의 기술이기 때문.
실제 내 경험을 예로 들면, 한때 피아노를 오래 쳤고, 한때 드라마 작가를 꿈꿨으며, 한때 영상편집을 참 즐겨했었다. 그때는 엄마가 “너는 한 가지도 우직하게 못 하는구나!” 꽤 속 터져하실 때가 많았는데, 내 '쓸모 없어 보이던 그 무수한 점들'은 정작 사회에서 일을 하며 빛이 나기 시작했다.
가령 똑같은 카피를 써도 남보다 좋은 스토리를 만들 줄 알았고, 콘티의 장면에 어울리는 좋은 음악을 고를 수 있었으며, 심지어 광고주 PT를 위해 급할 때는 간단한 편집까지 뚝딱 해낼 수 있었다.
세기의 천재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 대학 졸업연설에서 한 말은 꽤 유명하다. “미리 점들을 연결할 순 없다. 하지만 뒤돌아봤을 땐 연결할 수 있다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실제로 난 이 말을 '하나의 신'처럼 신봉하는데. 그건 스티브잡스 그 자신이 그 '쓸모없어 보이는 모든 것'들을 연결해 하나의 장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컴퓨터와 관계 없는 서예수업을 듣고, 역시 컴퓨터와 관계없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하지만 먼 훗날 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창의적인 컴퓨터' 애플을 만드는 시초가 됐다.
같은 예로,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역시 '점과 점을 이은, 장르 섞기의 대가'다. 비디오 가게 점원이었던 그는 정말 닥치지 않고 영화를 본 것으로 유명하다. 홍콩 누아르, 이탈리아 서부극, 일본 사무라이 영화, B급 액션까지. 정말 장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소화했다.
그리고 그런 경험으로 나오게 된 영화가 바로 <펄프 픽션>이다. <펄프 픽션>의 스토리도 꽤 다단한 점들을 이어 만든 결과인데, 갱스터 영화인가 싶다가 갑자기 코미디가 나오고. 누아르 같다가, 갑자기 B급 액션이 터진다. 어디 이뿐이랴? 서부극 대결이 나온다 싶으면, 갑자기 70년대 소울 음악이 묵직하게 흐른다.
그러니 오히려 영화는 뻔하지 않다. 사람들은 이 모든 장면을 애써 구별하려 하다가도, 그냥 영화 그 자체에 반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 이게 타란티노 스타일이네”
그리고 그 산만함의 조합은, 여전히 하나의 장르로서 깊이 추앙되고 있다.
나만큼 성격 급한 대학 후배가, 어느 날 집 근처에 찾아와 물은 적이 있다.
“어떻게 브랜드디렉터가 되죠? 그런 걸 잘 배울 수 있는 클래스나 학원이 있는 걸까요?”
이건 마치 사과를 잘 깎기 위해, '사과 깎기 학원'에 다녀야 한다는 논리와도 같다. 하지만 누구보다 다급한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난 그냥 현실적인 대답을 해 주었다.
“가급적 다양한 것을 배우고 기록해. 그게 숙성되어야, 진짜 인사이트가 생기는 거니까.”
한때 부자가 되고 싶었을 때, 나를 속이는 모든 클래스의 속성은 이러했다. “빨리 부자가 되는 길이 있다. 딱 내가 말하는, 딱 이 단순한 공식만 숙지한다면.” 하지만 경험해 보니, 그런 길은 솔직히 존재하지 않았다. 그 강사가 말하는 '그 단순한 길' 역시, 그가 수년간 몸으로 경험한 것 중에 가장 그럴싸한 것을 골라냈을 뿐.
반대로 장르를 섞을 수 있다는 건, 언제든 내가 걸어온 그 모든 장르를 버릴 수도 있다는 말도 된다. 내가 요즘 지인들에게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다. “만약 내가 김밥장사를 하는 것이 최고의 길이라 확신한다면, 난 언제든 그 길을 갈 수 있어. 비록 한 번도 배워보지 못한 길일지라도.”
끝없이 변화하는 시대에, 한 곳만 바라보는 것보다 또 어리석은 것이 있을까.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유연성'이다. 눈을 열고, 멀리 보고, 또 늘 새롭게 보는 마음가짐. 그래서 내가 정의하는 '산만함'은 다른 말로 '유연함'이자 '창의성의 원칙'이기도 하다. 더 숙성되면 '나만의 장르'를 만들 수도 있는 재료!
그래서 혹시 지금 “난 애매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 방황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산만함' 마저도 진정 축복이라 말해주고 싶다.
컴퓨터 창을 10개 열어놔도 괜찮다. 책을 여러 권 동시에 읽어도 괜찮다. 취미가 너무 많아 머리가 아파도 괜찮고, 지금까지의 길을 다 버리고 새로운 길을 탐색해도 좋다.
그건 '산만한' 것이 아니다. '유연함의 콜라주'다. 그리고 언젠가 그 '산만한 점'들이 몸에 쌓이고 쌓여, 당신만의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를 만들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내가 제안하는 '생각 아이템'은 이것이다.
[생각편집숍 07. 산만함 콜라주]
*생각도구 : 여기저기 생각을 훔치는 기웃거림
*효능 : 한 우물 강박 해방, 잘 연결하면 대박 아이템이 나올 수도?
진짜 창의성은 더 이상 '한 우물'에서 나오지 않는다.
여러 우물을 기웃거리고, 섞을 때 탄생한다.
당신의 산만함은, 미래의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