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편집숍 아이템 04] 브랜드 트랜스포머
“핑계 대지 말라니까!”
예능 프로그램 <신입감독, 김연경>을 보다 보면, 같은 여자지만 “어머, 언니!”하며 손을 잡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1군에서 배출된 2군 선수들의 조합'이란 컨셉도 좋았지만, 이 우당탕탕 선수들을 레전드 슈퍼스타 김연경이 재정비 한다는 스토리는 그야말로 신박 of 신박! (아니, 어느 누가 하위 1%와 상위 1%의 상극 케미를 마다하겠냐고) 하지만 내게 '날아다니는 시청률'보다 더 인상 깊었던 건, 바로 김연경 감독의 '꺾이지 않는 패기'였다.
이제는 자신감이 없어졌다는 선수에게 그녀는 말한다. “그것도 다 훈련이야!” 나아가 실수를 연발하는 선수에겐 냅다 호통을 질러버린다. “미안하다고 할 시간에, 그냥 열심히 해!” 그리고 또 언제였지? 세상 온갖 사연을 짊어진 듯 흐느끼는 선수에게, 그야말로 초강수 팩폭을 날려버린다. “야! 잔말 말고 그냥 연습이나 해!”
이야, 그 엄청난 카리스마로 쐐기를 박는 참 교육의 장면이라니. 그야말로 스파이크! 강 스파이크!
이 감정을 이어 적는다. 지금 살짝 지쳐 번아웃이 온 이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이들에게. 그저 '꼬부기'에서 머무를 뻔했던 나의 찌질함과, 그 찌질함을 일깨워준 어느 전시에 관한 이야기를.
응? 무슨 얘기냐고? 음..., 그냥 지금부터 천천히 따라오시면 된다.
퇴사 후, 사실 하루도 빠짐없이 달렸다. 몸은 하나, 하고 싶은 아이템은 수만 개이니. 그 모든 일을 시도할 시간조차 숨 막히듯 빠듯했던 게 사실이었다.
“와 C, 이거 다 언제 하지?”
그만큼 내겐 정체성이 너무 여러 개였다.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 브랜드기획자. 글을 맛깔나게 싶은 예비 작가. 나아가 미래교육을 하고 싶은 사업가의 정체성까지. 그나마 그걸 두 갈래로 쪼개 선택한 것이, 어른 타깃과 아이 타깃의 일이었다.
사실 그동안 어떤 일을 할 때 딱히 힘든 적은 없었다. 회사에서 일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야, 걔 불러와!”의 '걔'는 늘 나였고. 누군가 절망하고 있을 때도, “제가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대범한 프로포즈를 서슴지 않았으니까. 한마디로 '조직 안'의 나는, 날아다니는 호랑이였다. 좀체 무서운 게 없고, 좀체 뵈는 게 없는 이 구역의 포식자.
그런데 갑자기 너무 많은 일을 해서였을까. 조직 밖에서 '내 일'을 한다는 건, 그때처럼 분명하지 않았다. 마치 하루하루,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느낌?
분명 몸은 자유로운데, 영혼은 365일 늘 수만 가지 '일'에 묶여 있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그 '일'의 효율도 내 맘 같지 않았다. 계획은 이미 '저만치' 앞으로 달려가는데, 현실은 아직도 요만한 진흙탕에서 와구와구 '허우적대는' 꼴이라니!
특히 빠르게 변화하는 AI 때문에, '나의 성장욕구'는 어느 순간 자꾸 체하는 느낌이었다. 대중문화, 브랜드, 사회이슈 등, 세상 트렌드는 다 꿰고 있어야 속이 편했던 내게,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는 AI의 흐름은 씹어도 씹어도 소화되지 않는 더부룩한 소화불량처럼 느껴졌으니까. 오죽하면 그 스트레스 지수가 극한을 찍던 날, 난 텅 빈 방에서 혼자 컴퓨터를 보며 이렇게 외쳤을까.
“이 XX야, 제발 그만 좀 진화하라고!”
그때 내 인생 난생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 여기서 그만 배우면 안 돼?” 내가 좋아하는 만화로 따지면, 그건 꼬부기 1세대에 영원히 머물고 싶은 느낌이었다
여기까지 꽤 달려온 것 같은데, 왜 또 나아가야 하지? 왜 새로운 걸 배워야 하지? 왜 자꾸 변해야 하지? 그냥 이대로 살면 안 돼? 이대로 살면 정말 큰일 나는 거야? 뭐 이런 '합리화'의 파도가 내 안을 물결쳤달까.
동시에 굉장히 무서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세상은 계속 변하고 있는데. 이렇게 가만히 서 있으면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되어버릴까 봐. 게임으로 치면 약간 이런 느낌이었다. “이승주 님은 그토록 잘난 척을 하다, 케케묵은 캐릭터로 사망하셨습니다.” 약간의 사망선고 느낌.
한번 멘탈이 무너지니 이후는 걷잡을 수 없었다. 지금껏 내가 한 모든 것들이 모두 다 무용지물처럼 느껴지고, 알 수 없는 무기력이 내 안을 채웠다. 내가 쌓아온 것들, 내가 좋아했던 것들은 모두 다 낡은 먼지처럼 훅 날아가는 기분. 심지어 AI가 “크크크” 비웃는 꿈도 참 여러 번 꿨다.
그렇게 “난 모기의 발톱 때만도 못한 존재야” 스스로 자학하고 있을 즈음. 가족들과 여름휴가를 가게 되었다. 그야말로 전혀 예상에 없던, 이웃 나라 일본으로의 여행.
사실 여행을 하면서도 별 다른 의욕이 없었다. 5일도 안 되는 여행 일정이 워낙 짧기도 했거니와, 남편이 오사카에서 열리는 '루이비통 전시회'에 가자고 했을 땐, 그야말로 헛웃음이 나왔다.
“아, 이렇게 낡아버린 여자는, 이제 날 닮은 구태의연한 전시까지 보는구나.”
그만큼 루이비통에 대한 내 인식은 '한 물 간 명품' 내지 '돈으로 바른 명성' 같은 것이었다. 더 저열히 얘기하면 우리 엄마 장롱에 한 자리 딱 차지하고 있는, '로고 잔뜩 바른 허영덩어리'? 그렇게 속으로 나는 사춘기 남자애 같은 저주란 저주는 다 퍼부으며, 나카노시마 미술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웬걸? 전시장 입구는 인상부터 달랐다.
“Visionary Journeys (비저너리 저니)- 루이비통 170주년”이란 주제는, 뭔가 묵직한 주제를 깔끔한 키워드로 압축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 170주년을 말하는 '첫 도입'은, 구구절절한 설명이 아닌 하나의 이미지로 대변되는 '거대한 구'였다.
한 12m 정도 되었을까? 사람 키보다 훨씬 큰 높이로 쌓아 올린 그 '구'는, 루이비통 수백 개 트렁크들로 촘촘히 짜여진 하나의 원형체였으니.
와! 이건 그냥 '구'라는 말보단, 그냥 모든 이의 눈앞에 루이비통의 역사를 확실히 압축해 놓은 느낌이었다. 그 어느 각도를 돌아봐도 루이비통 가방들이 앞, 뒤, 좌우 옆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마치 귓가에 이런 강렬한 메시지를 속삭이는 기분이었달까?
“자 기대해. 지금부터 말하려는 건, 내가 움직인 '그 모든 순간'에 대한 이야기야!”
여기까지가 '가벼운 충격'이었다면, 전시장 입구를 들어서자 본격 스토리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성과 감성을 중시했던 루이비통 가문은 책, 음악, 문화를 통해 감성을 채우고. 그것을 시대와 숨 쉴 수 있는 이성적 제품으로 기록하는 것이 철학이었는데. 이러니 시작부터 '아하!' 하는 끄덕임이 드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철학' 하나만으로도, 루이비통이 어떤 제품을 만들어갈지 참 명료해졌으니 말이다.
그건 한마디로 '시대를 리드하면서도, 시대와 숨 쉴 수 있는, 그래서 시대의 니즈에 딱 들어맞는 제품'으로의 여정이었다. 실제 1854년부터 시작된 170주년의 전시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란 그 구체적 스토리의 증명이랄까.
거친 나무와 가죽으로 만든 초기 앤티크 트렁크들로 시작, '콩고 원정용'으로 제작된 '탐험 가방'은 접으면 트렁크, 펴면 침대로 변신하는 섬세한 배려와 과학의 총체였고. 1910년 제작된 '서재 트렁크 (Library Trunk)'는 쫙 펴면 무려 60권의 이상을 책을 꽂을 수 있는 '움직이는 하나의 책장'이었다. (처음엔 브리태니커 백과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이후 책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용도변경이 됐다지)
이밖에도 오페라 가수 릴리 폰스가 주문했다는 '신발 서랍 (30개 이상 신발을 담을 수 있는)'은 “내가 바로 파리지앵 시크야”를 외치고 있었고. 지휘자를 위해 만들어진 '스토코프스키 서재 트렁크'는 접이식 책상, 타자기, 악보 서랍 등이 한 번에 포함되는 기발한 '휴대용 사무실'이었다.
그러니 이런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와, 이거 뭐야? 진짜 뭐야?” 그만큼 루이비통은 단순 가방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시대의 지성, 시대의 니즈와 함께하는 '사회적 트렌드'를 만들어 왔달까.
놀라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다음 섹션은 과거의 영광을 이어 '변화와 혁신'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지금도 우리는 변화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위해, 루이비통은 아예 우주 섹션을 꽂아 두었다. 거대한 암전 속, 마치 우주의 행성처럼 쭉 진열된 루이비통의 가방들은 '멈추지 않는 미래'를 강렬히 상징했고. 무라카미 다카시, 쿠사마 야요이 등과의 콜라보로 이루어진 섹션은, 단지 유명 작가와의 협업이 아닌 “시대에 질문을 던진다”는 빅 퀘스천의 의미를 선명히 부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 결정적으로! 이후 이어진 섹션에서는 루이비통의 '전통, 현재, 미래'가 한 번에 교차하고 있었으니. 지금까지 등장한 그 모든 가방들의 스케치들을 아날로그 섹션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장인의 손길로 꼼꼼하게 가방 하나하나를 검수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나아가 '최신 AI 기술'과 '로봇 팔'로 작품들을 또 한 번 검수하는 미래적 테크를 동시 구현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쯤에서 이런 탄성이 나오는 건, 정해진 순서. “아, 이 괴물 같은 브랜드라니!”
확실히 루이비통은 영리했다. 이건 전시를 넘어, 끝없이 변신하는 '브랜드의 뇌'를 엿본 느낌이었다. “이렇게 성장했고, 이렇게 성장하고, 앞으로 이렇게 생각하겠다”를 말하는 다층적 메니페스토의 선언.
전시를 보고 난 후, 한동안 신선한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이 친구, 진짜 트랜스포였구나”
루이비통은 확실히 트랜스포머였다. 로봇 영화에 등장하는 그 트랜스포머처럼, 기본 철학은 유지하되 시대에 따라 형태를 바꾸는 '트랜스포머'.
-1854년의 루이비통은 '여행 트렁크 제작자'였다.
-1896년 루이비통은 '모노그램 혁신가'였다.
-2000년대의 루이비통은 '아티스트 협업자'였다.
-그리고 지금의 루이비통은 'AI 시대의 럭셔리 큐레이터'다.
형태는 계속 바뀌었지만, 핵심은 변하지 않았다. 단지 시대에 따라 외양이 변주되었을 뿐.
순간, 내 머리를 딱 때린 누군가의 목소리는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인마, 너두 진화해야 한다고!”
비단 앞통수, 뒤통수를 넘어 심장까지 때려버린 그 목소리는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 내가 좋아했던 것들. 그건 '버려야 할 과거'가 아닌' 다채로운 변신의 재료라고. 그렇게 무언가를 계속 축적해 가며 꾸역꾸역 '챕터 1'을 만들고, 또다시 시대와 호흡하며 '챕터 2, 챕터 3...'를 만들어가면 그만이라고.
너무 복잡해 보이는 내 앞의 문제는, 누군가의 '거대한 인생'을 보면 흔적도 없이 말끔해진다. 내게 '루이비통 전시'는 딱 그랬다. “제발 그만 좀 징징대라고!” 따끔히 훈계하는, 단단한 거장의 가르침이었으니까.
그러니 당신도 오늘 혹시 일상적 허들에 낙엽처럼 부대끼고 있다면, 더 거대한 누군가의 인생, 브랜드, 아니 우주의 지도라도 한번 살펴보라. 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 앞에, 나의 '작은 여정'이라는 것은 수천번을 깨져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모기 같은 소리일 것이니.
그래서 내가 제안하는 오늘의 '생각 아이템'은 이것이다.
[생각편집숍 아이템 04. 브랜드 트랜스포머]
*생각도구 : 시대와 호흡하는 뇌
*효능 : 정체를 진화로 바꾸는 용기
진짜 장인정신은 '정체'가 아닌 '진화'다.
그리고 기억하자. 모든 '꼬부기'는 결국 '거북왕'이 되어야 한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