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로 풀어보는 고사성어 이야기
혹시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아는가? 난 알속에 있는 병아리가 혼자서 어찌어찌 껍질을 쪼고 부딪치고 그렇게 고군분투하면서 알을 깨는 줄 알았다. 그렇게 병아리가 세상에 나오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그럼 혹시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줄탁동기(啐啄同機)’라고 해도 좋고. 그 뜻을 들으면 감동할 거다. 무슨 뜻인데 그러냐고? 그래, 오늘은 그럼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는 그 얘기를 한 번 해보는 걸로.
자, 일단 오늘의 성어는 저기 위에서 이미 나온 ‘줄탁동기(啐啄同時)’다. 난 이 성어를 <양철북>이라는 소설책에서 처음 봤던 기억이 난다. 독일의 소설가 귄터 그라스의 그 ‘양철북’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이산하 시인의 자전적 성장소설인 <양철북> 말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 양철북과 법운스님이 여행하며 주고받는 대화가 압권이다. 그들이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또 얼마나 멋진 덤이던가.
아직도 기억이 또렷하다. <양철북>에서 시인이 던진 화두 하나, ‘줄탁’!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얘길 하면서 시인이 그랬던 것 같다. 북을 계속 치며 살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무거워 다시 알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고. 그 말은 시인의 절망이 켜켜이 쌓인 그 시간 너머에서 그렇게 나를 때렸었다.
오늘 그 기억을 소환하며 ‘줄탁동시(啐啄同時)’를 다시 펼쳐본다. 한자는 이런 모습이더라.
떠들 줄(啐), 쫄 탁(啄), 같을 동(同), 때 시(時)
‘줄탁(啐啄)’은 불교용어다. 알속에서 병아리가 나오려고 할 때 입으로 빨고 있는 소리를 ‘줄(啐)’이라 한단다. 그럼 탁(啄)은? 어미 닭이 병아리를 나오게 하려고 부리로 껍질을 쪼는 것이 탁(啄)이다. 좀 어렵지만 ‘줄탁(啐啄)’은 이런 의미를 지닌 단어인 거다. 이에 비하면, ‘동시同時)’는 너무 쉽다. ‘같은 때’라는 뜻이고 저 한자어와 똑같이 ‘동시에’다.
그래서 ‘줄탁동시(啐啄同時)’는 정확히 무슨 의미냐? ‘새끼와 어미닭이 알의 안팎에서 서로 빨고 쪼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란다. 이게 불가(佛家)의 중요한 공안(公案)이라는데. 선종(禪宗)에서 공안(公案)이라 함은 ‘참선 수행자가 궁구하는 문제’를 가리킨단다. 한 마디로, 참선수행에 있어서 절대적인 규범성과 판단의 준칙이 되는 핵심적인 명제인 거다.
대체로 이 공안을 화두(話頭)와 같은 말로 아는데, 엄밀하게는 이 둘은 다르단다. 내가 이해하는 ‘화두’는 수행하는 과정에서 본질에 대한 의구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질문이나 핵심주제다. 그러니까 의문스런 말 머리를 잡고 늘어져서 오직 그것만을 의심하는 방법?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 사실, 별 차이를 모르겠음.
암튼, 오늘의 성어는 그럼 어디서 나온 건가? 11세기에 송(宋)나라의 장군방(張君房)이 편찬한 도교(道敎) 교리의 개설서(槪說書)라고 전해지는 <운급칠첨(雲笈七籤)>에 이런 말이 있단다. 재밌는 고사는 없나보다. 하긴 불교용언데 뭘 기대하겠나.
‘오이가 익으면 꼭지가 떨어지고(瓜熟蒂落), 줄탁은 동시에 일어난다(啐啄同時).’
전자는 익은 오이에서 꼭지가 떨어지듯 때가 되면 무슨 일이든지 자연스럽게 이루어짐을 이르는 말이겠다. 그 뒤에 나오는 ‘줄탁동시’는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밖에서 어미 닭이 쪼고 안에서는 병아리가 껍질을 빨며 서로 힘을 합쳐야 함을 의미하렷다. 생명이라는 건 이렇게 외부적 환경이 내부적 역량과 적절히 조화되었을 때만이 탄생된다는 아주 뭉클한 의미를 담고 있는 거다.
‘줄탁동시’니 ‘줄탁동기’니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 얘기를 하고 있자니 떠오르는 게 있다… 데미안!! 거기서는 새가 나오지만 말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는데, ‘알은 곧 세계’라고 하지 않았나.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태어나는 건, 그토록 어려운 거다.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부숴야 하는 일이다. 돌아보니, 나에게도 인생의 어려운 고비고비마다 저 어미닭처럼 나와 함께 해주던 이들이 있었구나. 내 세계를 깨는 그런 고통의 순간마다 저 너머에서 나를 끌어당겨주던 손길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문해본다. 그 길이 그렇게도 어려웠냐고. 그저 어렵기만 했던가. 마치 소설 <데미안> 속의 주인공 싱클레어가 된 것처럼 지난날을 회고하며 위로 받는 밤, 이 시간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