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로 풀어보는 고사성어 이야기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이 있다.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교수자와 학생이 함께 성장한다는 뜻이렷다. 내가 생각하는 ‘앎으로의 도상에서 만나는 가장 이상적인 배움의 상태’랄까? 이 의미는 사자성어를 이루는 한자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으리라.
가르칠 교(敎), 배울 학(學), 서로 상(相), 길 장(長)
‘교학(敎學)’은 ‘가르침과 배움’ 일 테고, ‘상장(相長)’은 ‘서로 자란다’가 아니겠나. 그러니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가 서로를 성장시킨다’는 의미가 되시겠다. 이 말은 <예기(禮記)>에 나온다.
<예기(禮記)>라 함은 49편(編)으로 이루어진 유가의 경전, 오경(五經)의 하나다. 근데, 왜 예경(禮經)이 아니고 예기(禮記)야? 오경(五經)이라며? 그렇다. 오경(五經) 중 하나면 당연히 ‘경(經)’이 붙어야 하거늘 <예기>라니… 예(禮)에 관한 경전을 보완(補完)하고 주석(註釋)을 달았다는 뜻으루다 그렇게 불렀단다. 그런데 중요한 건, <예기(禮記)>에는 ‘의례(儀禮)’의 해설 외에도 음악·정치·학문 등 다양한 영역까지 아우르며 예(禮)의 근본정신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 <예기(禮記)>의 ‘학기(學記)’편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是故學然後知不足,教然後知困。知不足然後能自反也,知困然後能自强也。故曰:‘教學相長’也。” 이런 고로 배운 연후에 부족함을 알고, 가르친 연후에 어려움을 안다. 부족함을 안 연후에 능히 스스로를 돌아보고, 어려움을 안 연후에 능히 스스로 강해지나니. 이에 가르침과 배움은 서로 성장시킨다고 하는 것이라.
‘가르침은 배움이 반’이라고? 그렇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만큼 좋은 배움은 없다잖은 가. 하지만 그 ‘좋은 배움’의 경지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인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처절하게 깨닫는 게 먼저다. 스스로 모자란 부분을 찾아 더 깊이 배우는 계기가 될 테니.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배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그래서 <서경(書經)>에는 ‘학업의 반은 남을 가르치는 동안에 이루어진다’는 뜻의 ‘효학반(斅學半)’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열명(說命)’편에 나오지 아마? 음… 저기 한자가 또 생소하겠군. ‘효(斅)’, 바로 이 글자 말이오. ‘가르칠 효’ 자요. ‘효학(斅學)’은 그러니까 ‘교학(敎學)’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게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성어와 함께 이 ‘효학반((斅學半)’도 머릿속에 입력!!
그럼, 제자들을 많이 배출해 낸 똑똑하신 공자님도 제자에게 배우는 그런 경험을 해보셨을라나? 공자는 문답을 통해 토론하면서 학생들의 생각을 이끌어내는 데 아주 능숙한 스승이었다. <논어(論語)>의 ‘팔일(八佾)’편에 보면, 공자와 그의 아주 총명한 제자 자하(子夏)가 <시경(詩經)>의 한 시구(詩句)를 두고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자 자하(子夏)가 질문하고 공자가 그에 답하고, 자하가 스승의 답변에 대해 또다시 묻고 하는 과정에서 공자가 외려 예(禮)에 대해 새로운 이치를 깨닫는 순간이 온다. 그때, 공자가 뭐라 했느냐? ‘이제 비로소 자하와 더불어 시(詩)에 대해 논할 수 있게 되었다’며 아주 기뻐했다지.
저 공자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면, 아니 저 때 공자의 깨달음이 얼마나 컸던 지를 알면 예(禮)와 시(詩), 더 나아가 <예기(禮記)>와 <시경(詩經)>의 관계가 아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게 되리라. 자하(子夏)가 시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 시의 의미를 예와 연결시켜 풀어냈으니, 공자가 보기에 제자가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견했을까. 공자가 제자를 칭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하와 더불어 <시경(詩經)>에 대해 논할 수 있다고 말한 대목만 봐도 공자의 마음이 읽힌달까. 이 과정이 스승인 공자에게도, 제자인 자하에게도 아주 큰 배움의 시간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교학상장(敎學相長)이 아니고 무엇이랴.
어디선가 읽은 것 같다. 학생이 질문할 때 그것을 받을 줄 아는 교육자는 종을 치는 것과 같다고. 이게 무슨 뜻이냐? 작은 당목으로 치면 작게 울리고 큰 당목으로 종을 치면 크게 울린다는 의미겠다. 공자가 제자의 질문을 받아 큰 당목으로 치는 소리처럼 크게 울리게 만들지 않았는가. 공자의 정신세계에서 시가 차지하는 그 엄청난 무게가 느껴질 정도로. 공자에게 있어 도(道)의 세계는 ‘생각함에 사악함(思無邪)’이 없는 어진 마음(仁)인데, 그것을 표현한 것이 시(詩)라면 말 다했지 뭔가.
아… 할 말이 너무 많아지는데? ㅠ 나중에 <시경(詩經)>에 대한 얘기를 따로 한 번 해야 할까 보다. 암튼, 오늘의 성어,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의미를 돌아보노라니 그동안 내게 그 숱한 배움을 주었던 다정한 얼굴들이 스쳐간다. 나의 감사하는 이 진심이 지금 이 순간 그 친구들의 마음에도 가 닿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