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로 이민 온 후 처음 맞는 새해 정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겨울은 참 시렸다. 해를 볼 수 있는 쨍한 날보다 비 오고 흐린 날이 더 많은 이 회색도시의 겨울은 홍콩영화 제목처럼 비정성시(悲情城市)가 된다. 이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단 한 번도 해본 적도 꿈꿔본 적도 없는 사업을 감히 시작했다. 한국에선 경험해보지 못한 육체노동을 게스트하우스 오픈하고 거의 6개월을 하고 있던 나와 남편은 체력적 한계에 달했고 몸과 마음은 완전히 방전된 그로기 상태였다. 우리 부부가 사사건건 안 부딪히는 게 없을 정도로 둘 다 극도로 예민해진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말을 잃었고 그저 기계처럼 할 일만 하는 영혼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남편 역시 그런 아내를 보면서 마음이 편할 리 없지만 삶은 지속되어야 했기에 아무 일 없는 척 하루하루 살아내는 중이었다.
그렇게 타향살이에 외로움인지 그리움인지 모를 사무침으로 유난히 추웠던 겨울, 정월 대보름날이 찾아왔다. 조식 시간이 끝나고 늘 하던 대로 청소까지 마치고 나니 감기 기운인지 온몸에 한기가 들기 시작했다. 참다못해 어쩔 수 없이 카운터 뒤에 마련된 전기장판이 깔린 소파 침대에 몸을 뉘었다. 내가 몸이 아프다는 걸 분명 눈치챘을 텐데도 무심한 내 남편은 늘 그렇듯 아랑곳하지 않는다. 평소와 다름없이 카운터 컴퓨터 앞에 구부정한 자세로 돋보기 너머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다. 거기다 한 술 더 떴다. 등 뒤에서 끙끙 앓고 있는 아내에게 한 마디 툭 던진다. 어깨가 요즘 더 아프니 늘 침놔주는 그 중국 의사한테 전화해서 예약을 하란다.
이것이 그이가 아픈 아내를 대하는 방법이다. 아내가 조금이라도 아픈 눈치가 보이고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으면 이렇게 선수를 쳤다. 자기가 먼저 아파버리고 먼저 기분이 안 좋아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야 아내로부터의 챙김을 그대로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와이프가 아프다는 걸 인정해버리고 아는 체하면 그때부턴 자기가 불편해지니까. 아내가 아픔으로 인해 자신의 생활 리듬이 깨지는 걸 원치 않았으므로.
‘나도 지금 아프다고요. 안 보여요? 말이라도 괜찮냐는 한 마디 해주면 안 되죠? 당신은.’ 무정한 남편 등 뒤에 대고 외치고만 싶었던 이 말은 언제나 그랬듯 입 밖 세상 구경도 못하고 내 안에서 조용히 사그라지고 말았다. 남편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란 걸 안다. 사랑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법을 모르는 남편이 이젠 적응도 되었으련만 왜 매번 이렇게 서러운지 모르겠다.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우리는 여태껏 이렇게 살아오지 않았던가. 뭐 새삼스레 화낼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바로 일어나 중국 의사 선생님한테 전화를 걸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 목소리로 진료예약을 하고 자리에 다시 누웠다.
생각지도 못했다. 너무 일상화된 일인지라 딱히 특별할 것도 없이 난 아무렇지 않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나 보다. 실은 많이 서러웠던가 보다. 머리가 베개에 닿기가 무섭게 눈물이 뜨겁게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 스스로도 당황하리만치 갑작스레 터져버린 눈물,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죽여 훔칠수록 더 서럽게 폭발하는 이 눈물의 실체는 대체 뭐란 말이냐.
엄마가 그리웠나 보다. 그리운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냐마는 오늘은 몸도 마음도 아픈 서글픈 상황에서 엄마가 너무도 절실하게 보고팠던 거다. 이불속에 누운 채 마음속으로 엄마를 부르는데 눈물은 콸콸 눈가를 타고 전속력으로 내달려 귓가를 적셨다.
남편한테 우는 거 안 들키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봤지만 흐느낌을 넘어 꺼이꺼이가 된 울음은 도저히 숨겨질 수가 없었다. 그 순간에도 많이 아프냐는 따뜻한 말 한마디는 끝내 남편으로부터 내게 닿지 않았다. 내 남편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저만치에 그저 있다. 그저 거기 있을 뿐이다. 그이는 그렇게 서툴렀다. 아내가 아픈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정말 몰랐다. 아니 몰랐다고 믿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알면서도 그랬다면 더 슬플 테니까 말이다. 아픈 아내를 위해 뭔가를 하고 싶지만 그 방법을 모르는 거라고 믿고 싶은 거다. 그래야 내가 산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방법은 ‘괜찮냐’는 말 한 마디면 되건만 그 쉬운 시작을 시도조차 못하는 사람이 내 남편인 것을.
그렇게 눈물과 외로운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프랑크푸르트 근교에 사는 친구로부터 카톡이 왔다.
“오늘 대보름인 거 알지? 슈발박 한인마트 가면 오늘 나물이랑 찰밥 공짜로 준다. 꼭 가서 먹어. 알았지?”
참 닮고 싶은 경상도 특유의 화끈한 성격을 가진 이 사람, 내가 많이 좋아하는 친구다. 시원시원한 성격에 남 챙겨주는 건 또 왜 그리 잘하는지. 이 친구 옆에 있으면 마치 엄마 같고 언니 같고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이 친구가 이곳 독일 하늘 아래 함께 있다는 건 내겐 큰 위안이었다.
“남편이 안 가주면 나 혼자는 가기 힘들어. 차로 가야 하잖아. 그리고 나 지금 많이 아파.”
사실이었다. 이렇게 허탈하게 내뱉는 내 머릿속엔 ‘언감생심 내 남편에게 그런 호사스러운 기대를? 내가?’하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남편더러 갔다 오라 해.”
다른 사람들한테는 분명 별 거 아닌 일인데. 내겐 이 별 거 아닌 걸 남편에게 부탁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웠다. 매번 너무 당연한 상황에서도 남편 눈치만 보다마는 그런 바보였다. 이렇게 자기 한탄을 하던 와중에도 보름날이라고 특별히 찰밥이랑 나물 등을 무료로 제공하는 한인마트가 있다는 말에 내심 감동했다. 가족을 떠나 낯선 땅에 나와 있는 한국 사람들을 위해 대보름 나물과 찰밥을 정성스레 만들어 대접하는 그 정이라니.
그리고 찰밥 좋아하는 나를 잊지 않고 챙겨주는 친구의 따뜻한 마음이라니. 몸도 마음도 유난히 시렸던 겨울날 그 사람 냄새나는 정이 나를 포근하게 감싸는 느낌이었다.
그날이 대보름이라는 걸 알고 나니 작은언니가 해주던 찰밥이 문득 그리워졌다. 남편 뒤에서 누운 채로 붉은빛에 윤기가 좔좔 흐르는 찰밥을 떠올리던 내 눈은 허방을 헤매고 있었다. 넋 나간 듯 남편의 등을 응시하면서도 입에서는 찰밥이 먹고 싶다는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언니 얼굴이 오버랩되며 미치도록 찰밥이 사무치던 순간이었다. 그때 카톡음이 다시 울렸다. 또 그 친구다.
“내가 오늘 아침에 그 마트에 가서 가져온 찰밥이랑 나물 절반 덜어놨어. 오후에 남편 공항 픽업 있다 했지? 우리 집 지나가실 때 잠깐 들르시라 해. 조금이지만 맛이라도 봐.”
도저히 안 되겠던가보다. 공항 근처에 사는 그 친구는 기어이 남편의 공항 픽업 스케줄까지 기억해내고는 그렇게 나 찰밥 먹이겠다고 발 벗고 나섰다.
찰밥 덕후라 할 정도로 나는 찰밥을 정말 좋아한다. 한국에서는 꼭 보름날이 아니어도 평상시에도 내가 먹고 싶다고만 하면 엄마도 언니도 찰밥을 해주곤 했다. 독일에 오니 언니는 이제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내가 해 먹어도 될 테지만 찰밥은 내가 절대 하지 않았다.
그건 나만의 불문율이었다. 늘 나 자신이 우선이 되지 못하던 내 삶에서 찰밥은 나에게 주는 유일한 선물이었다. 찰밥만큼은 꼭 누군가가 나를 위해 만들어주는 걸 먹고 싶었던 거다. 그 누군가는 과거엔 당연히 내 엄마였고 이젠 늙으신 엄마를 대신해 내게 찰밥을 해주던 작은 언니였다.
언니는 엄마의 솜씨를 고대로 빼닮았다. 이 동생을 위해 엄마의 대를 이어 찰밥을 해주리라 다짐하기라도 한 듯 그렇게 엄마의 맛을 고스란히 살려냈다. 나에게 찰밥은 단순한 음식 이상의 사랑을 의미했다. 그래서였을 게다. 이 외롭고 서럽던 순간에 나는 찰밥을 해주던 언니의 사랑이 눈물 나게 그리웠던가 보다.
찹쌀을 물에 불리는가 싶으면 팥 삶는 냄새가 은근하고 달큼하게 코끝을 간지럽히고 눈 깜짝할 새 언니는 뚝딱뚝딱 탱글 하면서도 찰진 찰밥을 해내곤 했다. 언니는 팥만이 아니라 돈부콩도 넣고 어떨 땐 내가 좋아하는 알밤과 호랑이 무늬를 한 큼지막한 강낭콩도 함께 넣었다. 팥물이 들어 불그스레 연한 빛이 도는 찰밥은 내 인생 메뉴였다. 소금간이 되어 먹기 좋게 짭조름한 찰밥이 모락모락 김을 내며 내 눈앞에 등장하면 그 어떤 고급진 요리도 부럽지 않았다.
볼 때마다 탄성을 부르는 나의 최애 음식 찰밥은 몸이 아플 때도 기분이 우울할 때도 내 몸과 영혼의 완벽한 치료제였다. 마음이 헛헛할 때면 그래서 더더욱 찰밥이 필요했다. 바로 지금이 그때였던 거다. 이렇게 아픈데 언니가 해주는 찰밥을 먹으면 금방 나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그 한인마트에 가서 나를 위해 찰밥을 가져 다 달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카톡을 해놓고 보니 더 애가 닳았던 친구는 내 남편이 공항으로 손님 픽업 가야 하는 걸 알고는 묘안을 생각해냈던 것이다. 그렇게라도 찰밥 좋아하는 친구에게 찰밥을 꼭 먹이고 싶었던 거다. 찰밥 얻으러 한인마트에 다녀오라면 짜증 낼 남편이지만 그 친구 집에는 군말 없이 다녀올 것임을 친구도 나도 너무도 잘 알았으므로. 결국 친구가 직접 남편에게 찰밥 가져가라는 카톡을 보냈다.
그 지난하고도 가슴 아픈 과정을 거쳐 나는 독일에서 처음으로 맞는 대보름에 찰밥을 맛볼 수 있었다. 마음이 몸보다 더 많이 아팠던 그날에 말이다. 친구의 그 애틋한 노력으로 결국 내 앞에 배달된 찰밥을 한 입 뜨던 순간, 겨우 힘겹게 잦아들던 눈물이 또다시 핵탄두급의 눈물 폭탄을 터뜨렸다. 그 대보름날에 축대가 있다면 무너지고도 남을 소낙비 같은 큰 울음을 한참 동안이나 더 서럽게 토해내고야 말았다.
찰밥 이게 대체 뭐라고. 내게 있어 하나의 ‘사랑 확인법’처럼 느껴지던 찰밥으로 인해'그리움’이 두께를 더해가던 내 마음이 서러움으로 폭발하던 순간이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저 멀리 한국에 계신 엄마랑 언니에게 내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란 것인지도 모르겠다. 출발은 비록 찰밥이었지만 결국 나는'사랑’이라는 원초적인 힘에 지고 만 것이다. 그 사랑이 사무쳤던 게다.
머나먼 독일 프랑크푸르트 한 귀퉁이에서 차오른 슬픔 한 스푼이 주인인 불룩 솟은 고봉밥을 찾아 헤맸던 거다. 사랑 한가득 담긴 찰밥 한 공기가 사무치게 그리웠던 것이다. 이국땅에서 그 눈물 젖은 찰밥을 한 입 물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그동안 명치끝 꾹꾹 눌러 놓은 그리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가보다. 매일매일 꽃무릇의 붉은 그리움 그 가슴께에 심으며 견뎌온 날에 대한 보상이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