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에 눈이 내리면…

by 지오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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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종강을 하고 조금은 편하게 맞이한 토요일… 오래간만에 이불속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아침이다. 배를 깔고 엎드린 채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읽는다. 오래전 읽었던 소설의 장면들을 떠올리며 시인의 눈을 따라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흔적을 찾아 시간여행에 나섰다.


그때, 청아하게 울리는 ‘까똑’. 독일 사인방의 단톡에서 울리는 알람 소리다. 독일에서 인연을 맺은 4명의 여인이 만나는 곳이다.


여인 1 왈. “독한연 모임이 있어서 청주 가는 길^^”

곧이어 내가 답했다. “독한연 ㅋㅋ”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발음 주의!!!”

여인 1이 친절하게 바로 해석해준다. “독일 한국의 인연, 년!!! 요거 아님! ㅋㅋ”


분명 장난으로 올린 말이었음에도 ‘인연’이란 단어를 보는 순간은 괜히 반성하게 되더라. 언제 봐도 참 울림이 있는 단어다. 이 귀한 단어로 감히 농담을 하다니 불경스럽도다. ‘저의 이 부박함을 용서하소서.’


그때까지 나타나지 않는 두 여인은 바쁜가 보다고 하니 여인 1이 대뜸 시나리오를 쓴다.


“한 여인은 밥하고 있고, 한 여인은 멍 때리고 있고.” 내가 이어서 썼다. “한 여인은 청주 가고 있고.” 다시 여인 1이 마무리한다. “한 여인은 방콕에 있고.”




맞다. 나는 지금 방콕에 있다. 그리고 내가 머무는 유월의 방콕에는 하얀 눈이 내리고 있고.

카톡 대화를 마치고 다시 설국 여행을 이어간다. 책을 계속 읽어 내려가다 한 단락에서 가슴이 턱 내려앉으며 코끝이 시큰.


‘체념에는 체념이 주는 힘이 있다. 깊은 체념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안다. 체념이 힘이 된다는 것을…….. 희망보다 체념을 먼저 배운 자는 잔치가 끝난 다음의 미학이 무엇인지를 안다. 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그 흔적들만 어지럽게 널려 있는 공간에서 몸을 일으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분명 색다른 미학이다…..’(허연의 ‘가와바타 야스나리’ 중에서)

나는 그 힘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걸까. 나에게도 ‘모두 다 끝났다고,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그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독일의 아우토반 위를 달리며 그 절체절명의 체념 끝에 써 내려간 첫 줄의 힘은 그 무엇보다도 강했다.


‘그래도 살아야 하나보다. 그래야 하나보다.’


어느 시였더라. 눈이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하며 내린다고 했던.
그 시처럼… 지금 이 순간, 나의 방콕에는 그렇게 눈이 내린다.
괜, 찬, 타, ‥‥‥괜, 찬, 타, ‥‥‥괜, 찬, 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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