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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킴 Aug 04. 2020

리쥐안의 [아스라한 해바라기 밭]

[번역후기]


언제부터 해바라기를 좋아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가을이 오면 길가의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에 가장 먼저 마음을 뺏기곤 했던 소녀였으니까. 그러니 가장 좋아하는 꽃도 당연히 늘 코스모스였다. 그랬던 내 두 눈에 황금빛 해바라기를 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던 걸까? 군부대 뒷산을 해바라기 동산으로 만들었노라 말한 이가 있었다. 나는 그를 내 멋대로 ‘피터팬’이라 불렀다. 그가 들려주던 동화 같은 얘기에 매료되었고, 어느 순간 해바라기가 내 마음에 훅 들어왔다. 영원처럼 느껴졌을 그 힘든 시기에 틈만 나면 산을 오르내리며 해바라기 씨를 뿌렸을 피터팬의 순수성에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어디서든 꽃을 피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마음이 따뜻할 거야.’


중국 에세이 [아스라한 해바라기 밭]을 만난 건 2018년 가을, 부서진 마음으로 독일서 한국으로 컴백한 직후였다. 번역을 결심하게 된 건 8할이 에세이 제목이었다. 해바라기에 대한 짝사랑으로 시작된 번역이었다. 하지만 정작 내 마음을 빼앗은 건 저자 리쥐안이었다. 지구 한 끝자락에 살고 있는 나와 똑 닮은 고독한 우주 하나를 만난 것이다. 진심으로 작가가 궁금해졌다.


고비사막이 어디에 있는지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그런 내가 세계 전도를 펼쳤다. 자발적으로 지도를 들여다본 게 처음이지 싶다. 사람들이 세계일주다 뭐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꿈을 꿀 때도 호기심이 발동한 적 없었다. 나를 세계지도 앞으로 이끈 건 지리책에나 있을까 이쪽 세상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어느메쯤 살고 있을 작가에 대한 관심이었다.


‘고독’과 ‘외로움’은 철학적 접근 말고는 아주 단순하게 거의 같은 말이라 치부했었다. 그 차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시작도 그저 ‘작가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다’였다. 다른 게 아니라면 작가는 왜 이 두 단어를 구분해가며 썼을까. 이제는 알 것도 같다. 어슴푸레하게나마.


‘고독’은 ‘홀로 있음’이다. 인간이 태생적으로 갖는 기본 감정일 수도 있다. 반면 ‘외로움’은 ‘마음 나눌 인간관계의 부재로 인해 느끼는 쓸쓸한 마음 상태’다. 고독하다고 해서 반드시 외로울 거라 단정 지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끄러운 이곳과는 다른 편벽되고 조용한 그곳에서 살아가는 작가 리쥐안은 고독을 일상으로 안은 친구였다. 외로움이 한 번씩 찾아왔을 테지만 그녀가 위축되지 않았던 건 고독 자체를 사랑한 때문이 아닐까. 그토록 지독한 고독의 공간에서도 그처럼 밝게 유머를 장착할 수 있음이 그렇다고 답하는 것만 같다.


세상과 단절된 그 적막한 사막에서 살아가는 작가의 삶 자체가 주는 울림이 컸다. 리쥐안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면 그 상대는 자연이었을 게다. 그 고요하고 척박한 땅에서 작가가 마주하는 것들은 하늘이고 바람이고 돌멩이고 해바라기고 강아지며 소였다. 그녀는 그 모든 것들에 생명과 감정을 부여하며 친구가 되었다. 그들의 처지가 되어 인간의 무자비함에 희생되는 것들을 애도하는 작가의 마음이 너무도 따뜻해서 뭉클했다. 등장인물이나 각종 가축들에 대한 묘사에서 읽히는 그녀만의 유머 코드가 나는 참 좋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배꼽 잡을 정도로 웃긴 그녀의 글에선 뭔지 모를 페이소스가 묻어났다. 웃음 뒤엔 늘 눈물이 났던 이유다.


그녀의 슬픔인지 내 슬픔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칠 때면 나는 번역을 멈추고 책상에 엎드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할 수만 있다면 금방이라도 그녀에게 달려가 꼭 안아주고 싶었다. 그녀의 웃음은 ‘슬픔’의 다른 이름이었다. 무감하게 툭툭 던지는 유머 속에서도 나는 그녀의 상처를 보았고 깊은 슬픔이 오롯이 느껴졌다. ‘왜 사냐건 웃지요.’ 하던 시인의 달관이었을까. 리쥐안과 함께 웃고 울기를 반복하며 견딘 시간들 속에서 서서히 내 마음의 굳은살도 박였다. 리쥐안 발(發) 은유의 눈보라를 온몸으로 맞으며 그렇게 내가 단단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리쥐안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 주변의 모든 사물에 대한 따뜻한 애정, 그리고 그녀 안의 상처, 아픔과 상실이 한 데 어우러져 그녀가 고독을 친구 삼는 법을 배우게 한 것이리라. 눈을 돌리는 곳마다 가없이 펼쳐진 사막, 황량한 들판, 그리고 생명은 있으나 말이 없는 가축들... 그 속에서 그녀만의 생존법은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것. 오리의 마음도 되어보고 낙타의 처지도 되어보는 것이다. 그러니 작가가 곳곳에 구축해 놓은 메타포의 세계를 명징하게 해석해내는 것은 전적으로 번역자 몫으로 남았다.


내 머리가 조금만 더 똑똑해서 모조리 이해됐더라면 리쥐안과의 개인적 소통이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행이다. 내가 많이 부족한 덕분에 친구 하나를 얻었으니 이 얼마나 겸허해지는 감사인가. 내 머리로는 도저히 해결하지 못한 부분들을 낱낱이 적어서 리쥐안에게 메일을 썼다. 그렇게 편지를 매개로 한 소통이 시작되었다. 어떤 부분은 자기가 써놓고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두 손 들 때도 있었다. 참 솔직하고 인간적인 그녀의 매력이 폭발하는 지점이었다. 그럴 때면 감히 내가 대신(?) 해석해주기도 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한층 더 알아갔다. 그런 소통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진짜 친구가 되었다.


그래서 지구의 한쪽 구석에서 자연과 친구 하며 살아가는 그녀의 외로움을 모른 체할 수 없었다. 밤에 위쳇으로 대화를 나눌 때면 묻곤 했다. 칠흑같이 까만 밤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강아지들과 산책하는 길은 어떤 풍경인지... 그리고 해바라기 밭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지 궁금한 게 자꾸만 늘어갔다. 그녀의 일상 속으로 무작정 뛰어들고 싶을 만큼.


그러다 코로나 19가 중국 우한을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하더니 한국도 바이러스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중국에 대한 우리 국민의 정서가 악화되었고 급기야 출판사 대표님은 출판 시기를 무기한 연기해야 할 것 같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그래 이런 시기에 중국 에세이 출판이 웬 말인가.’


그리고 며칠 후 리쥐안에게서 메일을 받았다. 신쟝 그 먼 곳으로부터 날아온 안부가 또다시 나를 위로했다. 아니 이번엔 우리 한국 국민에 대한 위로였다.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뿐인데 그녀에게는 부채의식으로 남았나 보다. 나한테 미안하단다. 중국에서 발생한 바이러스라 면목이 없다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를 안심시키려고 이런 말도 보탰다. “다행인 건 중국에서 발생한 바이러스가 가장 강력하고 서서히 약화되면서 다른 곳으로 퍼져나가는 특성상 한국은 그나마 약해진 녀석들이 갔을 거라고. 큰 고비는 넘겼으니 잘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코로나 사태를 개인 리쥐안이 사과할 건 아닌데, 나는 그 예기치 않은 고개 숙임에 당황도 했지만 사실은 감동했다. 이렇게 거대한 재난 앞에서 국경을 넘어온 진심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7월, 8월이 해바라기가 만발하는 계절이라며 꼭 신쟝 자기네 해바라기 밭으로 놀러 오라고 나를 초대해줬다. 나도 여행은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리쥐안이 오라면 반드시 날아가겠노라 약속했다.

에세이 번역을 통해 이렇게 좋은 인연 하나를 또 만났다. 내면 가장 깊숙한 곳 그녀의 독백을 내 언어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나는 리쥐안과 하나가 되고자 했다. 내가 그녀고, 그녀가 곧 나이기를. 우리는 그렇게 한마음으로 한국어판 [아스라한 해바라기 밭]을 출산했다. 비록 내가 쓰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내가 쓴 것이다(보석 같은 원작을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함은 전적으로 번역자 능력 부족의 소치다). 리쥐안의 중국적인 사고와 언어가 나를 통해 한국 독자에게 다가가려고 준비 중이다.


번역 작업은 ‘장미밭에서 춤추기’라고 했던 한 번역가의 말이 떠오르면서 100% 공감하게 되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그렇지만 그 여정은 그동안 잊고 지냈던 소중한 기억의 편린들을 찾게 해 준 아프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내가 다시 힘내서 살아갈 이유를 깨닫게 한 작품이었고 친구였고 일이었다. 대자연의 모든 것들을 포용했던 리쥐안의 따뜻한 휴머니즘이 한국 독자들의 가슴에도 단비가 되어 촉촉하게 적셔주기를 기대한다. 메말랐던 내 마음 밭에 소리 없이 내려주었듯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해바라기 어쩌면 나에게는 푸르스트의 ‘마들렌 수도 있겠구나. 홍차에 ‘마들렌 적셔 맛보던 순간 ‘콩브레 마을 떠올리며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나섰듯  또한 ‘아스라한 해바라기  번역하며 ‘피터팬 떠올랐고 과거의 나를 찾아 나선  아니었을까.  길을 동행해준 친구 리쥐안은  인생의 값진 선물이었다.


謝謝,李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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