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의 끝을 마주하다.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게 흘러간다.
새 학기를 맞이하기 전, 그러니까 둘째를 갖기 전, 나의 재계약 심사일이 도래했다. 나는 2년마다 재계약을 해야 하는 계약직 교수였기에 재계약 요건에 맞는 자격을 갖추어야 했다. 둘째가 생길 줄 모르던 그 시기에는 혹시 모를 복직을 염두에 둔 터라 출산 후에도 틈틈이 연구실적을 쌓아놓았고 그 덕에 자격은 이미 갖춘 상태였다. 그런데 복병이 육아휴직이었다.
주변에 이렇게 2년 계약직 강의전담 조교수가 출산휴가 및 육아휴직을 일 년 이상 사용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 계약기간의 절반 이상을 휴직했으니 재계약은 힘들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육아휴직은 내 권리인데 내가 잘못이 없는데 왜 작아져야 하나 억울하기도 했고 반대로 더 당당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재계약 심사를 받기로 했다.
다행히 그간의 내 강의 평가와 학과 내에서의 평판은 나쁘지 않았고 학과장 교수님도 재계약 심사서를 호의적으로 잘 작성해서 올려주신 것 같다.(학과장 심사서는 내가 볼 수가 없으니 알 길이 없지만 결과를 보았을 때는 그랬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둘째를 임신하게 되었고 혹시라도 재계약이 불발되어도 그 또한 괜찮다는 심정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결과는 재계약 심사 통과.
그렇게 재계약을 마치고 새 학기를 맞은 2월 학과장 교수님의 전화가 왔다.
올해는 신입생 충원이 너무나 어려웠다고.. 작년보다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하셨다. (이후 결국 학과는 폐과 엔딩을 맞는다.) 이 와중에 3월에 내가 복직하면 교수들 간 책임시수확보에 또 어려움이 생길 것이 예상되어 나에게 어려운 말씀을 하고자 전화를 하셨다 했다.
말씀의 요지는..
나에게 한번 더 육아휴직 연장이 가능하겠냐는 것.
이미 일 년의 유급 육아휴직을 사용한 나는 만약 연장하게 되면 무급 육아휴직에 들어가야 했기에 직접 전화를 하신 모양이었다. 학과장 교수님은 직접 알아보셨다며 재계약 직후에도 육아휴직은 가능하다고 하셨고 무급이었기에 너무 죄송하게 생각하신다고 덧붙이셨다.
대답으로.. 나는.. 둘째 임신을 밝혔다.
그래서 나는 무급이어도 괜찮으며 다만 육아휴직이 끝나는 시점이 둘째의 출산예정시점과 맞물려 다시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 부분이 괜찮은지 여쭈었다.
학과장 교수님은 일단 그 부분은 가능할 것 같다고 하시며 어려운 부탁에 협조를 해주어 고맙다고 하셨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충원율 미달과 학과의 폐과 예상 등 사실상 내 커리어의 엔딩을 암시하는 이러한 상황이 오히려 내 인생에 전화위복 같이 느껴졌다. 다른 교수님들께 민폐끼치지 않고 되려 협조해줘서 고맙다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 편하게 육아휴직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임신 초기에 지방으로 출퇴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걱정되었는데 이런 걱정이 자동 해소가 된 것이다. 또 복직하려고 보니 아직 18개월도 안 된 첫째 아기 호랑이는 내 눈에 너무나 밟히는 아기였다.
무급인들 어떠한가 둘째의 임신과 출산을 온전히 가족과 함께 잘 보낼 수 있고 아직 너무나 아기인 첫째의 성장도 더 오래 곁에서 지켜볼 수 있음에 이 또한 잘 된 일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당시에 나는, 내가 스스로 학교에 또 학과 교수님들께 임신과 출산이 죄지은 일인 양 눈치를 보며 아쉬운 소리를 안 해도 된다는 것이 마음이 편해 좋았다.
그렇게 학과는 폐과를 맞이했고 나는 계약기간 내리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쓰고 계약 종료시점에 커리어는 끝이 났다.